라이킷 19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제국이 탐했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뉴욕 센트럴파크의 오벨리스크

by 류형돈 Jan 19. 2025
아래로

서양인들이 정착한 지 4백여 년이 지난 도시 뉴욕의 중심에는 조성된 지 2백 년이 채 안된 센트럴 파크가 있고, 그 동쪽 편에는 설립된지 백오십 년쯤 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박물관 옆 공원의 작은 언덕에는 이 박물관보다, 공원보다, 도시보다, 훨씬 오래전 조각된 돌 탑이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 명명된 오벨리스크입니다.


이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천 4백 년경 지금의 이집트 카이로 지역인 헬리오폴리스 (Heliopolis)에 처음 세워졌던 높이 21미터 무게 2백 톤의 돌 조각품입니다. 수많은 문명이 여러 돌을 겹겹이 쌓아 탑을 쌓았습니다만 오벨리스크는 하나의 돌조각으로 조각된 아주 특이한 돌탑입니다. 지금도 이집트에 가면 고대 채석장에 남아있는 미완성의 오벨리스크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돌로 된 지반에서 온전한 하나의 조각으로 돌을 파 내야 하는데 작업 중에 그 돌에 금이 가는 바람에 미완성의 작품을 채석장에 방치한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커다란 돌조각을 다듬은 후 섬세하게 상형문자를 새겨 넣고서는 그 무거운 돌 덩어리를 운반해서 세워야 하니 보통의 정성을 가지고는 세울 수 없는 것이 오벨리스크입니다.

이집트 아스원의 채석장에 미완성의 상태로 방치된 고대 오벨리스크이집트 아스원의 채석장에 미완성의 상태로 방치된 고대 오벨리스크

3천4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 오벨리스크는 수많은 격변과 전쟁을 겪었습니다. 원래 헬리오폴리스에 두 개의 오벨리스크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기원전 5백여 년 전 페르시아 제국이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이들을 쓰러트리고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수백 년간 사막의 모래에 파묻힌 채 방치 됐습니다. 그러다가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서 그의 부하 프톨레미가 이집트의 집권자로 등극했습니다. 그 후 수백 년간 프톨레미의 후손들이 이집트를 지배했는데, 그 왕조의 마지막 지배자가 클레오파트라 여왕이었습니다.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와의 사랑으로 더욱 유명한 인물이지요.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라이벌이던 로마 장군 옥타비우스가 안토니우스의 세력을 격멸시키면서 클로오파트라는 자살을 하게 됐고, 옥타비우스는 로마의 공화정 체제를 종식하고 황제로 등극하면서 이집트를 로마 제국의 일부로 복속시켰지요. 옥타비우스는 그 이후 아우구스투스 황제라고 불리게 됐고요.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점령하고서 이곳에 온 로마인들이 그 고대 석조 건축물들에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그리고 24미터 높이의 플라미니오 (Flaminio) 오벨리스크, 그리고 21미터 높이의 몬테치토리오 (Montecitorio) 오벨리스크는 아우구스투스 재위 당시에 이집트에서 로마로 옮겨 왔습니다. 현대적 중장비가 없던 시절 그 무거운 돌조각을 바다 건너 옮겨 오면서 백성들에게 "황제의 명은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늘을 찌를듯한 황제의 권위를 로마 전역에 과시한 것이지요. 현존하는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30여 개쯤 된다고 알려져 있는데, 로마인들의 오벨리스크 사랑 때문인지 그중에 지금 이집트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이탈리아로 옮겨 온 오벨리스크가 더 많다고 합니다.


오벨리스크에 관심이 지대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 휘하의 로마인들은 헬리오폴리스의 모래 속에 방치돼 있던 두 개의 오벨리스크도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왔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연인 안토니우스를 기념하겠다고 지었던 세자리움 (Caesarium)이라는 신전이 있었는데, 아우구스트는 이집트 정복 이후 안토니우스의 흔적을 싹 없애고 세자리움 정면을 개보수 공사한 후 그 앞에 헬리오폴리스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 두 개를 나란히 세우게 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이미 죽은 이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가 지은 신전 앞에 다시 세웠다고 해서 이 두 개의 오벨리스크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그 이후에 또 2천 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로마 제국은 멸망했고 이집트는 또다시 수많은 격변을 겪었습니다. 이집트는 초대 기독교 전파의 중심지중 하나였고, 7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문화권의 일부가 되었으며, 16세기에 오토만 (Ottoman) 제국의 일부로 복속이 됐습니다. 18세기 끝무렵에는 나폴레옹 군대에 점령을 당했고, 나폴레옹이 영국에 패망한 후에 몇십 년간 이집트에 자치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이 당시 자치정부가 이집트를 유럽의 선진국처럼 발전시키겠다고 운하도 파고 철도도 놓는 대공사를 많이 벌였는데요, 자본과 기술이 없으니 강대국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자본과 기술을 대 주는 열강들에게 이집트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들이 탐내던 고대 이집트 문화재를 내어 주는 것 외에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이집트는 대영제국에 클로오파트라의 바늘 두 개 중 하나를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큰 돌 덩어리를 바다 건너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았으니 영국인들은 60년이 지난 후인 1877년에야 이를 런던으로 옮겨 갔습니다.

뉴욕으로 옮겨오기 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서 있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뉴욕으로 옮겨오기 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서 있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19세기 후반이라 하면 미국이 서부를 복속시키고 푸에르토리코와 하와이에 세력을 뻗으며 제국의 위상을 갖추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로마나 대영제국처럼 미국에도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미국 정부 각료들이 이집트 정부를 설득해서 남은 하나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을 1880년에 가져가게 됐습니다. 그 큰 오벨리스크를 미국에 가져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일단 증기선에 실어서 대서양을 건너온 후에는 항구에서 맨해튼 센트럴파크까지 운반하는데 112일이 추가로 걸렸다고 하는군요. 자동차도 없던 시절이니 일부 구간은 수십마리의 말이 크는 마차로, 또 다른 구간은 임시 철도를 깔아서 2백 톤이 넘는 이 오벨리스크를 현재의 위치로 운반해 왔다고 합니다. 당시 오래된 석조 문화재의 작은 귀퉁이라도 기념으로 떼어 가겠다고 망치와 끌을 가지고 접근하는 미국인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 경찰이 밤낮 경호를 했다는 기록도 있고요.


이렇게 해서 센트럴파크에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 세워진지도 어언 백오십 년이 다 되어 갑니다. 하지만 3천3백 년 이상 건조한 이집트의 사막성 기후에서 굳건히 버티던 이 오벨리스크는 지난 백 오십 년간 뉴욕의 눈과 비를 맞으며 상당한 침식을 당했습니다. 처음 옮겨 왔을 당시 선명하던 표면의 상형문자들이 이제는 많이 희미해졌어요. 2010년에 이곳을 방문한 이집트의 고고학자 자히 하와스 (Zahi Hawass) 박사가 계속되는 오벨리스크의 침식을 뉴욕시에서 제대로 막지 않고 있다며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2014년에 뉴욕시에서 오벨리스크의 먼지를 털어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빗물에 침식되는 문제는 아직까지 대책이 없어 보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연을 간직한 것이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입니다. 3천4백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오벨리스크의 상형문자가 찬양하는 이집트의 신 호루스 (Horus), 라 (Ra), 그리고 파라오 람세스 (Ramses) 2세도 대중들에게는 잊혀졌고, 이집트, 로마, 오토만 제국, 나폴레옹의 프랑스, 그리고 대영제국의 영화도 허무히 사라졌지만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만은 아직도 묵묵히 서 있습니다. 이제 이 세계적 문화유산이 21세기 세계 경제, 문화, 예술의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만 그 사연을 모르는 이곳 시민들은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을 무심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지나치는군요.


이전 01화 뉴욕에서 보는 오천 년의 인류 역사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