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며느리로 산다는 것, 쉽지 않다. 한 달 전부터 머리가 약간 찌끈 거 렸다. 1월에 이런 현상이 생기면, 그건 설 명절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도 대한민국의 며느리이기 때문이다.
딸과 아들은 힘들지 않은데, 왜 며느리는 명절이 부담스러울까? 결혼 24년 차가 되고 보니 이제는 이런 증상이 훨씬 덜해졌다. 그래도 편도 8시간 이상 달려야 하는 고향 행운 여전히 쉽지 않다. 다행인 것은, 그동안의 결혼 생활이 이런 여행기를 조금 더 무난하게 느끼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친할머니 댁에 가야지."
별일이 없으면 명절 하루 전날 새벽에 길을 나선다.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한 간식과 물을 구입하고 가능하면 이른 시간에 출발한다. 아무리 안 걸려도 7시간 이상은 달려야 하기에, 일찍 도착하려는 마음 자체를 버렸다. 빨리 가려고 하면 운전도 힘들고, 차에 타고 있는 온 가족이 부담을 느낀다. 그래서 어디 여행 가는 기분으로 출발하며, 도착 시각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대부분의 명절에는 저녁 5시 정도가 돼서야 도착하게 된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대천해수욕장에 들러 예전에 남편과 데이트하던 시절을 돌아본다.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솜사탕 하나씩 들려주고,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시간이 더 여유로우면 내가 초임 시절 근무했던 학교를 방문한다. 초임 시절의 학교를 찾으면 30년 전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하다. 운동장에 세워져 있는 노란색 스쿨버스, 언덕 아래 있는 학교 관사, 지금은 사용하지 않을 것 같은 숙직실 등 예전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여러 공간들이 있다. 특히 조그만 운동장은 볼 때마다 정겹다. 그곳에서 여러 행사를 하고, 배구도 하며, 지역 주민들과 같이 식사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어색하고 힘들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지만, 이제는 모두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면이 되었다.
"이제는 차례를 지내지 말자."
코로나 이후 가족끼리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부분의 집이 명절 차례를 없앴다. 절대 이 대세를 따르지 않을 것 같던 우리 집안도 결국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정했다. 이 정도면 소히 명절 노동에 대한 부담도 없으니 명절이 뭐 그리 대수인가 싶지만, 여전히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해서인지 나는 늘 명절이 부담스럽다. 사실 시댁에 가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 않다. 어머님도 고지식한 시어머니 스타일이 아니셔서, 며느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으시고, 내가 가면 "항상 쉬라"고 말씀해 주신다. 이 점에서 어머님께 늘 감사드린다.
"오가는 시간이 너무 길다."
언제까지 이렇게 왔다 갔다 해야 할까?
어른들이 들으시면 서운해할 만한 이야기지만, 왕복 14시간 이상을 승용차로 달려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굉장히 신경 쓰이는 일이다. 그래도 부모님 댁에 가지 않는다는 건 우리에게도 더 서운한 일이라, 가능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다행히 아이들도 꽤 여행하는 기분으로 즐거워한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약간 신경 쓰이는 부분은 있지만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언제까지 고향 방문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는 동안만큼은 이런 기분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남편도 좋아할 것 같아서다.
설거지에 설거지를 더하다.
어느 날부터는 명절 때 종이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0명의 가족이 모이면 한 끼에 20개의 컵이 설거짓거리로 나온다. 그걸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고모가 어느 명절에 종이컵을 내밀며 “이제부터는 종이컵으로 하죠”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나도 동의했고,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요즘 젊은 남편들은 아내가 명절에 고생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는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하거나 전을 부친다. 아니, 이제는 전을 부치는 일도 대부분 사라졌다.
두 딸을 키우는 나로서는 이런 변화가 좋다. 1년에 딱 두 번,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이면 누구도 피곤하지 않고 편안하며 즐거웠으면 좋겠다. 내 아이도 어느 집안의 며느리가 되고, 누군가의 엄마가 될 텐데, 적어도 명절이 두렵거나 힘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나도 결혼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명절을 대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편으로는 자주 어머님을 뵙지 못하는 남편의 마음이 얼마나 서운할까 싶어 애써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안 보이려고 노력한다. 결혼 초에는 이런 노력이 남편의 눈에 들지 않았지만, 요즘은 이런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남편을 본다.
K-며느리로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것, 쉽지 않지만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이번 설 명절에도 받아들인다. 명절이 며느리들에게 조금 더 편안한 기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 두 아이를 위해서도, 그리고 미래의 두 사위를 위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