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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태평양 어딘가에 내 냉장고가 있다"

by 호주아재 Mar 26. 2025

이삿짐이 태평양에서 표류 중이라니, 이건 거의 내 인생 최초의 글로벌 스케일 실종사건이었다.

12월 7일, 드디어 이사가 완료되었다. 하지만 "이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가 가져온 짐은 그야말로 초미니멀리즘의 끝판왕이었다. 캐리어 3개, 전기밥솥 하나, 냄비 두 개, 수저 포크 세트 하나, 그리고 몇 개의 그릇과 플라스틱 용기. 이게 전부였다. 아, 그리고 부랴부랴 주문한 싱글 침대 두 개, 책상 두 개, 의자 두 개까지 포함하면 어쩌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 정도는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원래 있어야 할 이삿짐들이었다. 한국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야 할 가구, 주방용품, 전자제품 등이 배의 고장으로 인해 태평양 어딘가에서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해운회사와 매일같이 통화하며 얻어낸 결론은 딱 하나. "죄송합니다. 최소 한 달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한 달...? 내 소중한 한국짐들이 한 달 동안 태평양 어디에서 유람한다고?
분명 처음에는 화가 났다. 그런데 이게 생각할수록 너무 어이없어서, 나중엔 웃음만 나왔다. "야, 이거 어디 가서 말하면 다들 안 믿겠지?"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함께 사는 동생들의 너그러운 마음이었다. 분명 불편함이 컸을 텐데도, 단 한 마디의 불평 없이 "오빠, 괜찮아요~"라며 이해해 줬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부족한 살림살이를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냈다. 바로 음식이었다. 그것도 바로 K-Food "한식"이었다.

아내는 몇 개 안 되는 냄비와 그릇으로 매일같이 세네 가지 반찬과 메인 요리를 뚝딱뚝딱 만들어냈다. 제대로 된 식탁도 없었지만, 그 맛만큼은 호텔급이었다. 우리에게 부족한 가구는 있었지만, 부족한 한식은 없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생존 스킬도 터득했다. 냉장고가 없으니 모든 재료는 상하기 전에 신속히 소비해야 했고, 자연스레 '당일 소비' 원칙이 생겼다. 김치찌개는 첫날 뜨끈하게 먹고, 다음 날 졸여서 반찬으로 먹고, 마지막엔 볶음밥으로 변신하는 기적을 경험했다. 식재료 보관 문제로 인해, 일주일 내내 양배추가 들어간 모든 메뉴를 연구하며 ‘양배추 마스터’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날은 "오늘 저녁 메뉴는?"이라는 질문에 "양배추 찜!!"이라는 단어 하나로 대답이 끝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의 첫 한 달은 "태평양 어딘가에 내 이삿짐이 떠돌고 있다"는 현실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며 지나갔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냉장고보다 중요한 건, 그 안에 들어갈 음식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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