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닫은 건, 나였습니다

4편-붉은 단풍잎이 푸르른 소나무를 품을 때

by 윤서

단풍나무 아래, 숨 막히는 생존


찬란한 붉은빛으로 세상을 물들이는 단풍잎.

그 예쁜 빛 속엔 아무도 모르게 감춰진 비밀이 있습니다.


자신만의 생존을 위해, 단풍나무는 조용히 주변 생명을 억누릅니다.

어린 나무들이 자라지 못하게 하고,

작은 숨결들이 피어나지 못하게 하며—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자신만의 리듬으로 계절을 흘러 보냅니다.


붉게 타오른 자리에 홀로 서서,

고요하게. 단풍나무는 외로운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우리 가족의 시간도, 그렇게 조용히 굳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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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무거운 침묵


아빠는 성실하고 묵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복된 삶의 실패가 겹쳐질수록,

그의 침묵은 가족에게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침묵은 말보다 무거웠고,

그 조용한 통제는 마치 단풍잎처럼,

아이의 마음을, 숨결을, 꿈을 조용히 짓눌렀습니다.


아빠는 늘 아이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기대와 기준 안에서 아이를 해석하고, 다듬으려 했습니다.


단풍잎처럼 강렬하고 확신에 찼던 아빠의 바람은,


자신의 기준과 틀 안에 아이를 가두려 했고,

‘성공의 길’만이 정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폭우처럼 아이의 마음을 쓸어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정작 아이를 품어주려는 따뜻한 마음도,

자신의 잘못도 없었습니다.


아이를 위한다는 말로 포장된

좋은 학교, 좋은 점수가 전부였고,

끊임없이 다그치고, 쉴 틈 없이 재촉하며

결과만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조용히, 천천히 마음의 문을 닫아갔습니다.



꺾인 꿈, 가려진 진심


아이는 애니메이터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떨어지더라도 도전하고 싶은, 스스로 선택한 첫 번째 꿈이었습니다.


특성화 고등학교에 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고 합격 통보를 기다린 날.

아빠는 무심하게 말했습니다.


“확인 안 해도 돼. 떨어졌대.”


우리는 그 말 한마디에 꿈을 접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알게 된 진실—

아이는 합격했고,

아빠는 그 사실을 알고도 조용히 감췄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불안과 판단으로,

아빠는 말없이 아이의 길을 꺾은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아이는 더는 아빠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반복되는 설득 속에서 점점 지쳐갔습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는 조용히 아빠와의 시간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한 사과, 다가오는 마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던 아이.

버텨내지 못한 시간 앞에서

무너지고 흔들리는 아이의 모습에

그 또한 조금씩, 변화해 갔습니다.


다그침으로는 더 고립되고,

재촉으로는 더 멀어지는 아이 앞에서

그 역시 무너지고 부서지며

다시 아이에게 닿기 위한 시간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변화는 말보다 먼저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서툰 손길로 아이의 물건을 챙기고,

함께 밥을 먹으며,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조심스레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도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려 애썼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속도로,

조용히 아이 곁에 머무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변화는 느렸지만, 확실했습니다.

포기 속의 희망처럼, 슬픔 속의 사랑처럼

아이의 마음을 조용히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단풍에서 소나무로


찬란했던 단풍잎은 이제 색을 거두고,

푸르른 소나무처럼 변함없는 자리에서 조용히 아이를 바라보려 합니다.


무표정하던 아이의 얼굴에 잔잔한 기색이 피어나고,

닫힌 마음의 문틈 사이로

조용한 기척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아빠는 네가 할 수 있다고 믿어.

이제는, 네가 원하는 걸 말해주면…

아빠가 다 도와줄게.”


기다림은 때로 무력해 보이지만,

그 기다림이 사랑이 되어 마음을 감쌀 수 있다면—

우린 다시 마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단풍이 스러진 자리에

소나무 같은 사랑이 천천히 자라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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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는 찬란한 붉은빛으로 자신을 숨기듯,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주변을 밀어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아이를 지키려다 오히려 아이의 시간을 멈추게 했던,

아빠의 지난날을 닮아 있습니다.


이제 아빠는,

단풍이 감추었던 혼자만의 시간을 소나무처럼 감싸줄 수 있는

넉넉하고 조용한 사랑으로 다가서려 합니다.


아이의 속도에 발을 맞추며,

때로는 멀찍이서, 때로는 곁에서

그늘이 되어주는 다정한 어른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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