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편-빗소리보다 먼저 들린 아이의 사랑 이야기
현관 앞에 멈춘 발자국
빗소리보다 먼저 들려온 건, 현관 앞에 멈춘 아이의 발자국이었습니다.
골목 끝에서부터 스며든 비 냄새와 젖은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현관문 안쪽까지 파고들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빗물이 어깨를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지요.
그 빗물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든 걸까요.
한동안 그늘졌던 눈빛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고, 축 처져 있던 어깨는 빗물마저 감싸 안듯 조금 더 단단히 일어서 있는 듯 보였습니다.
장난기 속에 묻힌 질문
그 모습을 보니 가슴 한켠이 뭉클해졌지만, 장난기가 먼저 고개를 들었습니다.
어깨를 툭 치며 물었죠.
“너, 뭔가 있지?”
“뭐가? 아니야, 아닌데…”
짧은 실랑이 끝에, 부침개 반죽을 뒤집개로 탁탁 두드리며 소리를 냈습니다.
기름 위에서 ‘지글지글’ 부침개가 익어가는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졌습니다.
뜻밖의 고백
뜨거운 김이 오르는 부침개를 접시에 담아 하나를 잘게 잘라
아이에게 건넸습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졌습니다.
“아들, 여자친구 생겼어?”
순간, 아이가 젓가락을 멈추더니 작게 더듬거리며 대답했습니다.
“아니… 아니야…” 그러곤 얼굴을 감추듯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 발끝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에, 사랑이 아이에게만큼은 스쳐 지나갈 줄 알았던 저는 순간, 가슴속이 고요히 흔들렸습니다.
닫힌 마음속의 ‘가족’
텅 비어 있던 아이의 마음이 누군가로 가득 채워졌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낯설 만큼 따뜻하게 다가오는 걸까요.
“누구야? 누군데?”
얼굴이 금세 붉어진 아이는,
“엄마… 사진 보여줄까? 진짜 궁금해?”라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갑 속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냈습니다.
“엄마 닮은 것 같아요.”
“왜? 너 엄마 닮은 사람 좋아해?”
“엄마 닮으면… 엄마랑 잘 지낼 것 같아서요.”
그 한마디에, 아이의 닫힌 마음속에도 늘 ‘가족’이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니— 눈시울이 또다시 뜨거워졌습니다.
빗속에 번져온 평온
빗줄기가 이렇게 따뜻할 줄은 몰랐습니다.
습하게 다가오던 공기마저 포근했고, 이제는 새로운 시간들이 아이와 함께 이어져 갈 거라는 기대가 마음속에 번져왔습니다.
손가락으로 숟가락을 꼭 쥐며 밥을 떠먹는 모습에도 힘이 느껴졌고,
오물거리는 입술 사이로는 끼득끼득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정말… 마음을 놓아도 되는 걸까.
오늘만은 꼭 안아두고 싶은 순간
물방울이 바다로 흘러가, 내리쬐는 태양 아래 잔잔히 부서집니다.
그 빛줄기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 강물 따라 올라온 친구를 만나고 하늘의 목소리를 들으며 함께 내려와서일까요.
오늘 내린 비는, 하루 종일 아이의 사랑 이야기를 고이 품어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득 스쳐간 한 생각이 작은 물결처럼 가슴속을 흔들었습니다.
평온이란, 빗방울처럼 조용히 젖어들다가도 언제든 소리 없이 깨져버릴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오늘만큼은 이 평온을, 더 꼭 안아두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