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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블러 이곳에 잠들다.

텀블러 재구매 이야기

by 이일삼


내가 같은 물건을 재구매할 때는 두 가지 경우에 해당한다. 첫 번째는 역시, 가성비가 좋을 때고, 두 번째는 대체불가인 제품일 경우이다. 가성비가 좋지 않더라도 절대 넘보지 못할 디테일을 가진 제품.


바로, 작년 4월 24일, 쿠팡에서 16,690원 주고 산 <반품 -최상> 락앤락 원터치 텀블러가 그러했다.


오늘 아침, 씨유에서 에스프레소 샷 추가(1,500 원)를 담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텀블러가, 작업실에 도착해서 보니 뚜껑은 열려 있고, 담아 왔던 커피도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축축한 가방. 여기저기 엄한 곳에 쏟으면서 온 게 아니라 다행이다 생각했다.


텀블러가 고장 난 것은 몹시 서운한 일이지만, 아쉬움은 남지 않는다. 지금껏, 가장 잘 한 소비 중 하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그런 것을 느꼈는지, 그 지점을 콕 집어서 설명하라면 꽤 난처할 것이지만, 굳이 말해보자면 아주 사소한 디테일에서 만족감을 느꼈다. 이를테면 표면의 질감 같은 것 말이다.


살면서 몇 가지 텀블러를 쓰면서 느끼던 불편 중 하나는, 손에서 잘 미끄러진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표면이 매트해 보이는 것을 선호했는데, 분명 매트해 보여서 샀던 것이 오히려 잘 미끄러진다거나, 손끝이 나 어딘가에 긁힐 때, 소름 돋는 쇳소리가 나는 일이 허다했다.


또 다른 불편은, 입구가 좁은 것이었다. 설거지를 할 때 손이 다 들어가지 않아서 텀블러용 수세미를 써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설거지가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어 여간 찝찝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텀블러 특유의 올록볼록한 쉐입 디자인을 불호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미역이 떠오르는 디자인이 유행하게 된 것일까?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거기다 색이 많이 들어가거나 로고가 큼직하게 박힌 것 또한 선호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쓰던 텀블러는, 나의 이런 디테일한 불호의 영역을 요리조리 피해서 만들기라도 한 것인지 거슬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애타게 찾아 헤매던 궁극의 텀블러와의 만남 같은 것이었다.


후회 없는 사랑에는 미련 같은 게 남지 않는 법이다. 고장 난 뚜껑을 보고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쿠팡에 들어가 똑같은 제품을 주문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내 곁을 지켜주던 텀블러를 마음속에 묻으며.


텀블러 (2024.04.24~2025.02.05) 편안하게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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