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서는 키가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교사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바라볼 때가 많다 보니 아이들 키를 좀더 크게 보게 된다.
그러다 퇴근길에 학교 밖 인도에 있는 우리반 아이를 보게 되면 저렇게 작았나 싶어 새삼 놀라곤 한다. 학교 밖에서 3학년 학생을 보면 거의 1학년처럼 느껴지고, 1학년 학생이었다면 유치원생처럼 보이는 새삼스러움이다.
교실에서 늘 크게 바라보던 아이가 저렇게 작구나 싶을 때, 내가 교실에서 아이에 대한 기대치를 너무 높이고 있지는 않았나 반성이 될 때가 많다. ‘저렇게 작은 아이가 교실에서 그렇게 잘해줬구나’
하는 고마움도 느낀다.
퇴근길 차창 밖으로 보게 된 아이들에게 내가 먼저 창문을 내려 인사하는 일은 잘 없다. 그냥 혼자 바라보며 지나가는데, 요즘 차의 썬팅이 점점 연해져서 간혹 아이들이 먼저 알아채고 꾸벅 인사를 할 때도 있다. 그럴 땐 손만 가볍게 흔들어주고 지나온다. 인사가 고맙긴 하지만, 아이들이 내 차에까지 신경 쓰게 하고 싶지가 않다.
한 번은 저녁에 가족들과 대형마트에 갔다가 우리반 1학년 여학생을 보게 되었다. 평소 교실에서 잘 나서지는 않지만 조용히 자기 할 일을 잘 해내는 볼수록 매력인 예쁜 아이다. 아이는 날 보지 못한 채 자기 오빠와 엄마 사이를 오가며 막내다운 귀여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학교 밖에서 보니 역시나 더 어려보이고 집에서는 저렇게 마냥 아기 같구나 싶었다. 아이만 있었다면 내가 먼저 인사하며 다가갈 수도 있었지만, 학부모님을 괜히 불편하게 할까 봐 차마 먼저 아는 척하지 못했다. 가정 방문이 사라진 요즘, 학생의 가정생활은 교실에서 아이를 통해 접하는게 다인데, 그렇게 슬쩍 엿본 아이의 모습이 편안하고 즐거워보여 기분이 좋았다.
다음날 학교 가서 “어제 마트에서 봤지롱”하고 말해줄까말까 고민하다 혼자 맘 속에 품어두었다.
그러고 보니 옛날 신규 교사 때 일이 생각난다. 시장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근무하며 자취를 했었는데, 하루는 퇴근 후 고무줄 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시장에 간 적이 있었다. 오가는 길에 아무도 마주치지 않아서 그러려니 했는데, 다음날 학교에서
“어제 선생님이 츄리닝에 슬리퍼 신고 시장 갔다 오는 거 봤어요.”
라고 신나게 얘기하는 우리반 학생이 있었다.
“어, 진짜? 난 아무도 못 본 줄 알았는데 네가 봤구나.”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속으로는
‘그래서? 내가 이상해보였나?’
생각하며 신경이 쓰였다.
이래서 교사가 집 근처 학교에 근무하는 것을 기피하나 보다. 동네 목욕탕에서 원시의 모습으로 학생과 마주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찔하다. 교사도 사람이지만, 교사와 학생 사이에 있어야할 적당한 거리는 유지해야 교실에서도 더 질서가 잡히지 않을까.
예전에 시골에 있는 나의 고향에 파견 근무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집에 놀러오던 남학생들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에게는 어머님, 아버님이라 부르게 하며 예뻐했는데, 서로에게 추억도 되었지만 다른 학생들에게는 그것이 위화감을 줬을 것 같아 지금 돌아보면 잘못했다는 생각도 든다.
함께 서 있을지라도, 너무 가까이 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원의 기둥들이 떨어져서 서 있고,
참나무, 사이프러스 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칼릴 지브란
사랑에 대한 칼릴 지브란의 말이 학생과 교사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와 닿는다.
각자의 공간을 존중하고 서로 사이에 바람이 통하도록 해주자.
교사와 학생 사이, 친구와 친구 사이에 존재해야 할 공간이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어 휑하지 않도록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