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에 온 지 일주일 만에 갑자기 트래킹을 가게 됐고 원래는 세인트 줄리앙에서 딩글리 클리프까지 갈 계획이었으나 생각보다 시간을 지체하고 날씨도 어두워진 탓에 임디나에서 트래킹을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번에는 임디나에서 딩글리 클리프까지 남겨 두었던 트래킹 이야기입니다.
갑자기 가게 된 몰타에서 첫 트래킹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아래 글을 먼저 읽으시면 됩니다.
지난번 임디나에서 멈추었던 트래킹을 다시 가게 된 건 그로부터 2주 뒤인 3월 말이었다. 중간에 내 생일이 있었고 어학원에서도 아는 얼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번 3명이었던 것과 달리 총 6명이 트래킹을 함께하게 됐다.
딩글리 클리프는 몰타를 여행한다면 꼭 가야 하는 스폿 중 하나로 몰타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일몰 여행지로 유명한 곳이다. 원래 계획은 일몰 포인트니 점심을 먹고 출발하는 거로 얘기가 됐는데 전날 저녁에 마이라가 저녁에 중요한 일정이 있어 아침에 출발을 원했기에 아침에 트래킹을 하게 됐다. 일기예보를 보니 미세먼지도 있고 구름도 끼는 날씨라 어차피 일몰은 보기 힘들 것 같았기에 이번에는 딩글리가 어떤 곳인지 한번 보고나 오자는 마음으로 나섰다.
지난번 트래킹이 임디나에서 끝났기 때문에 임디나까지는 버스를 타고 간 다음 임디나에서부터 딩글리 클리프까지 걷기로 했다. 이때는 다들 몰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버스 노선을 잘 알지 못해 그저 구글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였기에 버스를 1번 갈아타고 임디나로 향했다. 몰타 생활에 적응을 하고 난 뒤 세인트 줄리앙에서 임디나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집에서부터 임디나를 거쳐 딩글리 클리프를 걸어서 갔다고 했더니 다들 '버스를 두고 굳이 왜?'라고 물었다. 말인즉슨, 트래킹을 아무리 좋아해도 아무도 이 코스로는 트래킹을 하지 않는다. 그건 현지인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몰라서 걸을 수 있었다고나 할까. 몰타에서 지내는 동안 임디나도, 딩글리 클리프도 여러 번 갔지만 트래킹으로 가본 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몰타 일몰 스폿 딩글리 클리프
중세도시 임디나까지는 버스 1번을 갈아타고 약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임디나는 몰타의 첫 수도였던 곳으로 중세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임디나로 들어가는 문인 '임디나 게이트'는 '왕좌의 게임'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골목골목이 매력적인데 현빈이 출연했던 '하늘보리 CF'에서 열심히 골목길을 뛰어다니던 곳이 바로 이곳 임디나다. 중세수도였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7월 중순이면 임디나에서는 '중세축제'가 열린다. 주민들이 중세복장을 하고 그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축제로 다양한 재미가 있는 축제다.
골목이 아름다운 중세도시 임디나에서는 매년 7월이면 중세를 테마로 한 축제가 열린다.
임디나에 도착해서 바로 걷기를 시작할 줄 알았는데 다들 아침을 안 먹고 와서 배가 고프다며 임디나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이자 지난번에도 갔던 '카페 폰타넬라(cafe Fontanella)'를 다시 갔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2층 좌석으로 앉으니 사방이 탁 트인 몰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 같이 커피와 간단히 샌드위치와 이 집의 특별메뉴인 과일 크래페도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자 거국적으로 '짠'을 하고 당충전에 들어갔다. 이건 뭐 걷기도 전에 벌써 칼로리 폭탄인데 맛있는 건 또 못 참는다. 간단하게 먹는다고 들어간 카페에서 먹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또 1시간이 훌쩍 넘어간다. 이미 시계는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얘들아. 도대체 언제 걷는 거지?"라는 소리가 나오려는 찰나,
이제 출발하자며 드디어 일어선다.
임디나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으로 본격적인 트래킹이 시작됐다.
척박하고 건조함이 느껴지는 3월의 몰타에도 봄은 찾아왔고 들판에 군데군데 농사가 시작됐다. 농사지을 땅이 많지 않은 몰타이지만 딸기, 감자, 토마토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딸기는 몰타 특산물로 4월에는 딸기축제가 열린다.
그러다 어느 마을을 지날 때 친구 한 명이
"와, 내 집이다"라고 외쳤다.
몰타는 시내를 벗어나 도심과 좀 떨어진 지역에서는 자기 집 앞에 우리로 치자면 문패처럼 자신의 이름을 건물에 부착해 놓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외국인 친구들은 자신과 같은 이름이 있으면 그걸 무척이나 신기해하면서 기념사진으로 남기곤 했는데 이날은 마리아나가 자신의 집을 찾아냈다.
임디나에서 출발해 서쪽에 있는 딩글리 클리프까지는 구글 기준으로는 1시간인데 실상은 1시간보다는 좀 더 걸린 듯하다. 길이 계속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길이라 인도가 있어 위험하지는 않아도 걷기에는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다만, 큰 마을은 많지 않아도 계속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길이라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다.
곳곳에 돌담으로 쌓아놓은 길도 꽤 많아서 가끔은 제주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반갑기는 했지만 나라 자체가 작은데도 불구하고 외곽까지는 거의 관리가 안 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외곽이라고 해봤자 시내 중심가에서 차로 30분에서 1시간 정도면 닿는 거리인데도 말이다. 몰타의 입장에서는 1시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거의 5시간 정도와 맞먹을 정도로 상대적인 곳이었다.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해도 체감상 느끼는 건 큰 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나 역시 몰타에서 1시간 거리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고 외딴곳이라는 생각에 젖어들었다. 서울에서는 웬만해선 1시간인데 말이다.
즐거웠던 트래킹
3월 말이었는데도 여전히 날씨는 쌀쌀한 편이었고 딩글리가 가까워질수록 계속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은 다소 지치게 만들었다. 그래도 걸으면서 낯선 동네도 구경하고 식료품 트럭도 보고 봄맞이 집을 새 단장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차를 타고 갔다면 절대 느낄 수 없는 몰타 현지의 모습을 보게 될 수 있는 건 걷기만이 가진 매력이다.
그렇게 걷기 시작한 지 1시간 30분이 넘어가고서야 드디어 만나게 되는 딩글리 클리프(Dingli Cliffs)가 반가웠다. 이 첫 표지판을 만나고도 아마 30분을 더 걸었던 것 같다. 딩글리까지 쉬지 않고 걸어서 거의 2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한 딩글리 클리프다.
몰타의 서쪽 해안을 따라 절벽이 이어지는데 그 지역을 통틀어 딩글리 클리프라고 부른다. 완전히 깎아지른 절벽인데도 안전장치가 하나도 없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세인트줄리앙이나 슬리에마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딩글리 클리프에 솔직히 좀 당황했다.
지중해 한가운데 있어 해변으로 해안선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몰타는 해변과 맞닿은 곳은 많지 않고 대부분이 거의 수직 절벽에 가까운 지형이었다. 그나마 해변과 접하고 있는 곳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고 딩글리 클리프 쪽의 절벽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마을도 다소 떨어진 곳에 형성되어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아래로는 어떻게 저런 곳에서 농사를 지을 생각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농사를 지을만한 공간이 되겠다 싶은 곳은 자투리 땅도 개간을 해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자투리 땅 하나도 허투로 버리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
바닷가를 향해 서 있는 성당 하나가 삭막한 풍경을 그나마 지운다. 몰타는 다른 지역에 비해 서쪽이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았다. 주거지역과도 상당히 떨어져 있는 딩글리 클리피는 건물이 거의 없는데 그나마 바닷가로 향해 있는 성당이 있어 밋밋함을 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이 상당한 지역이라 그나마 낮에는 좀 덜한데 일몰을 보기 위해 저녁까지 있게 될 경우 4월 중순까지도 꽤 쌀쌀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기후의 특성을 반영하듯 이곳에서 자라는 식물들 대부분도 키 큰 식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선인장류에 해당하는 식물들이 많았다. 몰타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종종 캠핑을 하기 위해 선생님과 함께 이곳을 찾는 경우도 있긴 했다.
일단 딩글리 클리프에 도착을 하기는 했는데 다들 딩글리 클리프가 처음이라 정확히 어느 포인트가 좋은 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딱 이곳이 '딩글리 클리프'다 하는 지정 스폿이 있는 게 아니라 이 일대가 전부 딩글리 클리프로 불리는데 걸어서 족히 30분 이상 이어지는 곳이었다. 그래서 남쪽으로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아래까지 내려가보고 싶었으나 너무 가파르기도 하고 중간부터는 길이 끊어져 있어 내려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농사짓는 곳은 전부 사유지라 출입금지 팻말이 있기도 했다.
깎아지른 절벽, 딩글리 클리프
그러다 햇빛 좋은 적당한 곳에 다들 둘러앉아 각자 준비해 온 간직과 먹기를 나누었다. 음식 솜씨가 좋은 00은 참치 주먹밥을 싸가지고 와서 다들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어퍼 인터미디어트부터 엘리멘트리까지 레벨 수준도 다르고 나이도 국적도 다르고 EC와 ESE로 각자 다니는 어학원은 다르지만 몰타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기에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른하고 느긋한 주말 오후를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 대중교통이 다소 애매한 딩글리 클리프인지라 돌아올 때는 볼트(Bolt, 한국의 카카오 택시와 비슷하다)를 이용해 다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보지 못했던 일몰이 두고두고 아쉬워 시간 날 때마다 친구들하고 딩글리로 일몰을 보러 갔던 것 같다. 그 얘기는 차차 풀어놓겠다.
딩글리 클리프의 환상적인 일몰
덧. 다른 나라에서 한 달 살기와 어학연수를 하면서 한 달 살기는 근본적으로 좀 다른 것 같다. 한 달 살기의 경우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그곳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그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활동을 함께 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학연수의 경우 자연스럽게 어학원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그들과 다양한 활동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한 달 살기와는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두 경우 모두 현지인의 커뮤니티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세계각국의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어학연수는 큰 장점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한 달 살기 대신 어학연수를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