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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웰컴 투 부르고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어떤 날은 비가 오고 어떤 날은 태양이 뜨겁다.      


그날그날의 날씨가 천지 차이라 그에 맞춰 옷을 입는 것도 힘들다. 은수는 일단 따뜻하게 겹쳐 입는다. 머플러도 필수다. 더우면 벗으면 그만이지만 추우면 답이 없으니까.      


밤새 비바람이 몰아쳐 집이 날아가는 줄 알았다. 나은의 집은 지어진 지 30년이 된 주상복합아파트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보니 거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은수는 감기에 걸렸다.      


은수가 콧물을 훌쩍이고 약에 취해 해롱대는 모습을 보고 모모는 손을 흔들었다.    

 

“이게 바로 부르고스 날씨야. 웰컴 투 부르고스!”     


비가 오지 않는 날보다 비 오는 날이 더 많다. 태양의 나라, 스페인에서 가장 추운 도시가 부르고스라고 한다.      


     

은수는 17년 전 까미노를 걸을 때, 비행기 일정 때문에 부르고스에서 레온을 건너뛰었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두 번째 까미노, 메세타 고원을 걷는 것이었다. 은수는 부르고스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3일 만에 돌아왔다. 한국인 알베르게에서 먹은 김밥의 오이가 너무 썼고, 비가 너무 많이 내렸고, 감기 기운이 있었다.      




은수는 일주일 후 다시 까미노를 걸으려 했다. 그런데, 비바람이 거세더니 갈리시아 지방에 태풍이 왔다고 했다.      


“스페인 사람들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뭔 줄 알아?”     


“뭔데?”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말. 갈리시아 지방에 태풍이 와도 바르셀로나 마드리드는 전혀 영향이 미치지 않거든.”      


“하긴 그래서 한국사람들이 올레길 놔두고 스페인까지 와서 걷는 거잖아. 지평선을 보며 하염없이 걸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나라니까.”     


“다시 걸을 거야?”     


“걷고 싶어. 피네스테레의 버스 정류장만큼이나, 페레그리노들의 씨 유 어게인 합창만큼이나 좋았어. 메세타의 드넓고 고요하고 끝없이 펼쳐진 길이. 순간순간 변하는 하늘의 구름과 들판의 색이. 바람의 소리가.”     


은수는 삶에 지쳐 도망치고 싶은 순간, 갑자기 순간이동해서 가고 싶은 장소와 시간이 피네스테레에서 메세타로 바뀌었다.      



     

며칠 후 다시 비바람이 거세게 불었으나 다행히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갈리시아를 강타한 태풍은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까지 영향은 미치지 않았으나 500킬로미터 거리의 부르고스까지는 비바람을 뿌렸다. 풍속이 49킬로미터까지 달했다. 까미노를 걷는 한국인들의 단톡방에서는 70킬로그램이 넘는 사람도 바람에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다거나 나무나 간판이 쓰러져 길을 막았다고, 젖은 낙엽을 밟고 넘어져 피가 나서 헬기로 구조되는 순례자의 목격담까지 넘쳤다.      


은수는 다시 걷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거실 창도 바람을 잘 이겨냈다. 그런데...      


나무가 죽었다.     


은수의 방에서 내려다보면 크리스마스트리를 10배 이상 확대해 놓은 듯한 소나무가 두 그루 그보다 작은 아들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순간 풍속 49킬로미터의 강풍에 아들 소나무가 반으로 쪼개진 것이다.      



     

은수는 새벽 6시 반,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났으나 추워서 침대에 누워 꼼지락거리다가 8시가 넘어서야 일어났다. 물 한 잔에 유산균을 먹고, 커피를 내리려고 보니 캡슐이 떨어졌다. 아쉬운 대로 믹스 커피를 우유에 타서 마신 다음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운다. 나은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므로 은수는 아침마다 세수도 하지 않고 겉옷만 걸친 채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운다.      


찬 바람이 정신을 깨우는 데도 효과적이다.      


‘오늘을 글을 써야지! 나은이 자신의 식당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나도 내 할 일을 해야지. 내가 할 일은 글을 쓰는 것이지’     


생각도 한다.     


그런데, 오늘 은수는 밖으로 나갔다가 반으로 쪼개진 아들 소나무를 베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들어와서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다시 나가 보았다. 나무는 완전히 잘렸고 주변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다. 은수는 담배를 피우며 나무의 흔적을 본다. 그러다 나무의 잘린 밑동을 손으로 재 본다. 가로가 다섯 뼘이고 세로로 3뼘이다. 속살이 드러난, 잘린 밑동에 손을 대고 한참을 있다가 담배 한 대를 더 피우며 생각한다.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남을까?’     


17년 전에도 이번에도 은수가 까미노를 올 때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있었다.


갑자기 드라마 <도깨비>에서 공유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은수도 죽음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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