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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25. 2023

그래봐야 남들 다 가는 대학이 아닌가

왜 나의 두 아들은 양극단이 되었나




부모 하라는 데로는 살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첫째 아들이 신기해 어느 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는 왜 잘 살아보고 싶어 하지 않니? 우리가 부모인데 설마 너 안되라고 하겠냐. 그동안 너 하고 싶은 데로도 해봤으니 알 거 아니냐. 잘 안되지 않았냐. 그럼 이제 우리가 하라는 데로 좀 해보면 좋지 않겠냐. 그랬더니 아들이 말했다.


"그럼 열심히 해야 되잖아."


몰라서가 아니다. 인서울이라도 하려면 초등학교 때부터 한치의 어긋남 없이 살아야 한다. 매일 밥 먹는 시간만 빼고는 공부를 해야 한다. 점수와 등수와 등급과 백분율에 바싹 신경을 곤두세우고, 문제 하나만 틀려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일희일비 해야 한다. 실수는 허용되지 않는다. 누군들 그 문제를 틀리고 싶어 틀렸겠냐만, 어른들은 철저히 준비하지 못한 그것 또한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동안 많은 시간 허송세월 한 아들이 이제부터라도 달리려면 얼마나 더 피똥 싸며 달려야 하는지 아들도 아는 것이다.   


대학 입시가 어느덧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아들의 고3 친구들은 이미 몇 주 전부터 수시 시험을 치러 다니느라 주말마다 분주하다. 아들을 시험장 앞에 내려다 주고 돌아서는 엄마들의 마음도 가시밭 길인 건 마찬가지. 6년 내내도 공부한다고 밤늦게 들어오는 아들을 기다리며, 공부하는 아들 옆자리에서 함께 바느질을 하며, 아침마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아들 뒷모습을 보며 함께 울고 웃던 시간들도 이제 곧 끝나간다. 시험장에 아들을 들여보내고 함께 가슴을 조이는 친구들을 보니 내 맘도 덩달아 뒤숭숭하다. 첫째 아들이 다른 애들처럼 공부를 향해 달렸으면 나도 다르지 않았을, 무언가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시간들. 분명 중요한 과정이지만, 이 나라에선 너무 과열되었다고 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그 시간들을 내 친구와 아들들은 지금 지나고 있다.


나는 진심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이 평준화되길 바란다. 김누리 교수가 말하는, 모든 대학의 서열이 없어지고, 정말 공부하고 싶은 애들만 대학에 들어가면 좋겠다. 수학이나 영어가 모든 학생들의 기량을 평가하는 필수 과목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대학을 나왔다는 것이 그 사람의 전부를 평가하는 잣대도, 프리패스도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과목 몇 개만 정말 재밌어하면서 공부하면 좋겠다. 취직하면 대체로 아무짝에 쓸모없어지는 영어문법과 미분 적분에 모든 아이들이 매달려 공부라면 치를 떨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들이 대학을 포기했으니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대학을 포기한 첫째 아들 때문이 아니다. 좋은 대학을 가려고 오늘도 미친 듯이 공부하는 둘째 아들 때문이다.


나에겐 아들 둘이 있다. 첫째가 고3이고 둘째는 중3인데, 둘은 완전 다른 방식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다. 첫째가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것과 달리 둘째는 공부뿐 아니라 운동이며 악기며 손대는 것마다 다 잘해내지 않으면 못견딘다. 운동도 한 개가 아니라 축구, 농구, 배구, 배드민턴, 탁구, 수영... 모두 다 잘해야 하고, 또 수준급으로 잘한다. 제발 한두 가지만 잘하면 된다고 해도 듣지 않는다. 어디에서 '못한다'는 소릴 듣는 걸 못 견딘다. (딱, 남편이다. ㅠㅠ)


학교에서도 인싸 중에 인싸다. 하루에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 스케줄을 소화한다. 새벽에 수영장을 찍고는 바로 학교에 가서 수업 전 배구수업에 참석한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영어 학원에 들렀다가 수학학원을 가는데, 수학학원이 끝나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공부 빡세게 했으니 다시 운동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단다. 늦게까지 농구를 하다 들어온다. 그나마 주말엔 좀 쉬나 했더니, 얼마 전에는 고등학교 과학반에 들어가려면 과학 공부를 미리 좀 해둬야 하겠다며 친구가 다니는 과학 학원에서 개설한 12주짜리 과학 특강반을 끊어서 다니고 있다. 주말 역시 바쁘다. 기타와 드럼 수업을 받고 학원 보충을 하고 역시 밤 11시가 넘도록 집에 들어오질 않는다. 친구들과 옆동네 볼링장이나 당구장에 들러 게임 몇 판 치고, 노래방에서 노래도 하고, 가끔은 영화도 한편 봐야 하기 때문이다.  


밖에서 온통 에너지를 다 쏟고 들어오는 아들은 집에 들어오면 밥 먹는 것만 빼곤 방에 들어가 잘 나오지 않는다. 식탁에 앉아서 내가 해주는 음식을 너무나 맛있게 먹는 아들이 기특해 무슨 말이라도 걸어볼라 치면 이미 미간에 이렇게 쓰여있다. '피곤하니 말 걸지 마시오.' 둘째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유치원 준비물을 혼자 챙겼다. 엄마가 혹 잊어버렸을까 봐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아이였다. 숙제는 했나 해서 방문을 빼꼼히 열고 들여다보면 이미 앉아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니 바깥 일로도 너무 바쁜 아들에게 내가 어떻게 말을 걸 수가 있겠는가. 요즘 어떻게 지내니? 라는 추상적인 질문부터, 힘든 건 없어? 같은 정서적인 질문까지, 에미가 단지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사사로운 것들을 화제로 올릴 수 없었다. 유치원 때부터 여친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아들이 왜 여태 모쏠인지 같은 질문도 당연히 금지다. 뭐든지 다 알아서 잘하는 아들은 밖에서 너무 바빠, 집에서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먹고 쉬기만 해야 한다.  


이런 아들이 다시 내 불안을 자극한다고 하면 다들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았다며 혀를 차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밖에서 모든 에너지를 다 쏟고 들어오니,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두통을 달고 살았다. 둘째 아들에게 필요한 단어는 '적당히'인데, 그런 말일랑 아들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 아들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애들이 너무 이상하다"고 늘 말한다. 어느 날 남편에게 SOS를 쳐보았지만, 그 또한 같은 편이다.


"공부할 때 경미한 두통? 아빠도 다 있었고, 지금도 회사일 신경 많이 써서 하다 보면 가끔 아프거든? 아빤 그걸 어떻게 극복했냐면, 그걸 통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그런 건가 보다 하고 점점 익숙해져서 나중엔 무뎌져."


그 말을 하는 남편의 큰 머리통을 붙들고 마구 흔들어대고 싶다. 두통이 두통 아닌 게 되게 하라니?


둘째 아들을 보면 나 같은 가치중독자는 다시 이런 질문이 마구 쏟아진다.

'굳이 이렇게까지 빡세게 살아야 해? 그래봐야 남들 다 가는 대학이 아닌가.'


두 아들을 낳아 키우는 동안 내 안의 수많은 욕망과 만났다. 욕망일랑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내 안에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인 '불안'이 살고 있었다. 나는 이 사회가 경쟁적으로 쌓아 올린 교육 시스템 앞에 늘 조금 삐딱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돼지엄마들처럼 주류에 맞춰 열심히 달려가지도, 그렇다고 제도권 밖에서 다른 대안으로 살지도 못했다. 그저 한 것은 아들 뒤꽁무니나 좇아다닌 것뿐이다. 아들보다 더 앞서는 부모는 되지 말자 했다. 균형이라니, 적당히라니. 그래야 한다는 것만 알고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그건 아들에게 가르쳐야 할 단어가 아니라 곧 오십을 바라보는 내 삶의 영역에서조차 이뤄보지 못한 단어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식탁 앞에 앉은 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겨울 방학 영어 특강에 말없이 카드를 긁는 엄마가 될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나는 우리나라 대학이 모두 평준화되었으면 좋겠다. 내 아들이 두통을 달고 살지 않으면 좋겠다. 그게 저 먼 나라의, 무한한 가능성으로만 남을 단어일지라도. 공부는 재밌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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