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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구름 Apr 07. 2024

20240404~0406

2024_04004(목)

 늘어나는 약, 그리고 불안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예약을 해둔 날, 진료실에 들어가 앉은 몇 년 이래 처음으로 주치의 앞에 앉아 진료실 천장을 올려다봤다. 여기 앉아 이렇게 위를 올려다본 거 처음이네요. 그렇게 말하는 내 입에서 힘들다는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최근 심각하게 수면의 질이 떨어졌고 정서적으로도 불안이 심해졌다는 이야기와 갈팡질팡하는 마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스위스 여행 가이드북을 펼쳐놓고 책장을 넘기다가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 페이지마다 펼쳐져서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문득 아,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가서 경탄해 마지않다가 그렇게 스르륵 눈을 감고 삶의 엔딩을 맞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고도 했다. 상담가에게는 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2번의 상담 진행을 했을 뿐이라 아직 라포 형성이 덜 되었는지 6년째 보아온 주치의에게는 그래도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자살 사고가 고개를 쳐든 것은 또 왜일까, 심각할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극단적인 생각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프로작이 증량되고 잠 못 드는 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자기 전 먹는 약이 늘어났다. 정신건강의학과 약도 감기약처럼 증상을 완화시켜 덜 불편하게 해 주고 생활리듬을 찾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약을 먹는다고 병 자체가 사라지는 게 아님을 안다.(모든 약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 나의 경우에) 두툼해진 약봉투를 가방 안에 눌러 넣고 잘 닫히지 않는 가방을 애써 눌러 닫으며 병원을 나왔다. 내 마음도 이런저런 감정들이 불룩하게 튀어나와서 잘 닫히지 않는 가방처럼 볼썽사남게 불룩했다. 

 미로에서 길을 잃은 느낌, 도돌이표가 수도 없이 널려 있어 끝나갈만하면 되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도돌이표 지옥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은 걷어차 버리고 미래가 아닌 오늘, 해결 가능한 고민에 집중해서 넌덜머리 나는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영원회귀는 아니니 괜찮아. 전에도 빠져나갔으니 이번에도 나갈 수 있을 거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2024_04005(금)

 애니메이션 보다 펑펑 울기 

 금요일은 무비데이로 잡아놨고, 하루 2편의 영화를 봤다. 최근 컨디션으로 봐서는 영화 2편 보는 것도 무리인가 싶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가볍게 보려고 생각했던 애니메이션 <유미의 세포들>을 보다 엉엉 울어버렸다. 대책 없이 회사를 관두고 나와 글을 써보겠다고 도전하고, 어렵게 글을 연재할 기회를 잡았는데 글을 쓰면서 크게 휘청이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일어서는 유미의 이야기를 보면서 심하게 감정 이입을 한 탓이다. 나와 아주 동일한 상황은 아니지만 유사한 부분도 많아서였을듯. 

 <유미의 세포들> 속 세포인 '불안이', '작가', '사랑이'가 그렇게나 애틋하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신뢰를 받지 못해서 더 힘들었다는 생각에 내 안의 '불안이'와 '작가'에게 진심으로 미안해졌다. 그래, 내가 나를 더 믿어줘야지. 하나씩 더 믿음을 더해볼게. 여전히 나를 믿고 칭찬하는 게 어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죽하면 칭찬일기를 쓰며 연습할까! 그래도 멈추지 않고 해나가고 있다. 



2024_04006(토)

 호르몬 탓이었다면 다행 

 어제부로 망할 PMS로부터 해방되었다. 거짓말처럼 PMS로 인해 시달리던 극도로 불안정하고 우울했던 감정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너였어?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주기적으로 나를 미치게 만들지만 그게 호르몬 탓이라니 얼마나 다행이야. 어차피 너의 주기는 정해져 있으니 끝이 정해진 고통이라 생각하고 PMS의 종결이 오는 그날까지 맷집을 늘려 버티는 수밖에. 이번달은 다른 일까지 겹쳐서 몇 배로 힘들었는데 정말 거짓말같이 바뀌는 감정선을 느끼며 그래도 안도했다. 주치의가 처방해 준 프로작은 다음번에 또 찾아올 PMS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매일 꼬박꼬박 먹어둬야겠다. 프로작은 복용 후 2주는 지나야 효과가 생기니 미리 방어해 둬야지. 

 사방에서 벚꽃이 절정이라는 소식과 사진이 가득한데, 사전투표 하고 돌아오는 길에 본 벚꽃길 산책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내일이나 모레까지는 그래도 만개한 벚꽃을 조금 더 볼 수 있을 테니 내일 한번 더 벚꽃길 산책을 해야겠다. 꽃비를 맞으며 서 있을 때 잠시나마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일은 잠시 천국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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