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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백미 쾌속과 맛있는 인생

: 삶에는 '뜨거운 뜸'이 필요하다.

by 채움



"백미 쾌속.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바쁘고 정신없는 아침, 오늘도 나는 '백미 쾌속'의 버프를 받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20여 분이면 고슬고슬한 밥 한 공기 완성이다.

참 편한 세상이다. 버튼 하나면 밥이 되고 식사가 차려지다니.

옛날 사람들이 이 광경을 목도했다면 꽤나 호들갑을 떨었을 장면이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와 구수한 밥내음을 맡으며 생각해 본다.

내 인생도 이렇게 쾌속으로 흘러갔다면 어땠을까.






#1.

학교에서 아이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친구 관계의 서툶, 시험의 압박감, 진로 선택의 어려움 등으로 어깨가 무거운 아이들은 지금의 시간을 '견디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마음을 나도 아는지라 상담 과정에서 영혼 리스된 리액션은 선보일 수 없다.

모호한 미래를 향해 속도만 높이던 시절.

이 길이 맞는지 묻기보다는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던 시간들.

지금이야 이것들이 밤잠을 설칠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지만, 나 역시 학창 시절 아이들처럼 비슷한 고민을 하며 무수히 많은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하지만 정작 20대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훨씬 거칠고 복잡했다.

나의 20대는 <불안의 연속, 삽질로 인한 환장대잔치, 성실과 상실 어딘가> 등으로 함축할 수 있을 것이다.

패기와 열정이 있으니 포기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가능할 것이라는 순수함과, 그 못지않게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현실이 공존했다.


나는 백미 쾌속을 누르면 20분 만에 따끈한 밥이 지어지는 쿠쿠 같은 인생을 원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들과 나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며 채찍질했다.

나의 20대는 보이지 않는 결과물을 위해 '최종_최최종_최최종(진짜)_최최종(진짜)(이게 진짜). txt' 써 내려가는 지옥의 기획안 같았다.


경주마처럼 달리던 20대의 삶이 마냥 가치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기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초라함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는 나날이 부족했고, 종국에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텅 빈 초안, 반복되는 기획안, 그리고 쌓여만 가는 실패의 파일들.

그것들이 눈앞에 휘날리고 있었음에도 나는 확실하지 않은 그 무언가를 위해 자꾸 수정하고, 고치고, 지우며 살았다.


그땐 몰랐다.

밥이 빨리 된다고 해서 다 맛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결과물을 얻기 위해 빠른 속도만을 고집하느라 정작 무엇이 좋고 중요한지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저 시간이 빨리 흘러 30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만 간절했다.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흔들리는 20대의 눈에, 30대의 삶은 안정적이었고 여유로웠으며, 전문적으로 보였다.




#2.

갓 지은 콩나물밥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30대가 되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다.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일상, 명확한 취향, 안경 코받침을 올리며 눈을 반짝이는 꽤나 멋진 전문성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막상 30대 중반의 나를 돌아보니 20대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고민했고, 두려워했고, 갈팡질팡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대상의 변화.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드라마와 관련된 정보를 찾기 위해 유령처럼 인터넷을 떠돌았다면,

이제는 그 대상이 아파트 시세, 자동차, 육아 정보로 바뀌었다는 정도이다.


그 외엔 똑같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인생인지 매일 고민하고 불안해한다.


여기에 아이들에게 “복도 뛰어다니지 마라”, “급식은 먹을 만큼만 받아라“, ”칠판에 낙서하지 마라“ 같은 고요 속의 외침을 반복하고,

가끔은 교무실에서 초코파이 하나를 두고 네가 먹을래 내가 먹을까라며 아이들과 옥신각신하기도 한다.


철든 것 같지만, 여전히 철이 들지 않은 인생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모든걸 빨리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하지 않는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요즘 나는 밥을 지을 때, 가끔 쾌속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시간이 허락하는 날에는 버섯이나 가지, 감자 등을 넣고 천천히 뜸을 들인다.

밥솥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 밥이 눌러붙어 구수하게 퍼지는 냄새를 천천히 맡는다. 그 시간이 좋다.



#3.

나는 여전히 예상치 못한 상황에 흔들리고, 휘청거린다.

하지만 그 속에서 어떤 재료가 들어와야 더 맛있는 밥이 될 수 있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20대는 빨리 삶을 완성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 시기였던 것 같다.

30대는 완성보다 '익히는 중'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남들보다 느려도, 돌아가도 괜찮다.

나만의 속도로 흘러가는 지금의 30대가 참 좋다.

좋아지기 시작한 것들이 눈에 보이고, 좋아하는 것들을 천천히 오래 눈에 담아두려고 한다.


삶이란 결국, 밥을 짓는 일이다.

삶은 밥처럼 다시 데운다고 처음 그 맛이 나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우리는 더 신중하게 삶을 지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떤 밥을 지어야 될까.

이제는 백미 쾌속이 아닌, 시간을 들여 뜸 들인 밥처럼 천천히 삶을 요리 하고 싶다.

조금 질어도 괜찮고, 누룽지가 생겨도 좋다.


이 밥은 나의 속도로 지은 밥이니까.

이 인생은, 나만의 속도로 익는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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