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들
2월엔 열심히 읽다가 후반부엔 며칠 여행을 다녀오느라 비어 있다. 하필 여행 때 가져간 책이 잘 읽히지 않는 스타일의 소설이라 다 읽지도 못했다.
여행을 유니버셜 스튜디오로 다녀오느라 책 읽을 시간과 체력이 별로 없기도 했다.
간단히 톺아보도록 하겠다.
김지연, 구병모, 권여선, 송지현, 이주혜, 최진영 <2025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조경란, 신용목, 조해진, 반수연, 안보윤, 강태식, 이승은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N.K. 제미신 <다섯 번째 계절>
The Broken Earth Trilogy의 세 작품으로 3년 연속 휴고상을 거머쥔 N.K.제미신의 작품.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권위에 짓눌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재미와 의미가 좀 더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자주 찾아서 읽는다. (노벨문학상은 무겁다...) 부커상이나 휴고상이 만만한 편인데 종종 대단한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이 작품도 그렇다.
처음엔 조금 이해하기 힘들다. SF 소설이라 배경인 가상의 세계의 설정을 이해해야 하는데, 게다가 세 가지의 시간대와 등장인물이 돌아가며 등장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 첫 부분만 잘 넘어가서 설정이 모두 이해되어 고개를 주억거리며 책장을 넘기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절로 무릎을 탁 치며 "대단한 작가다... 이걸 이렇게 풀어버리네..."라고 감탄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약간 잔인하며 선정적이다. 신체 일부분을 베어버리거나 터뜨리는 건 예사이며, 남자 바이섹슈얼이 등장하여 주인공들과 그룹섹스까지 나눈다. 작가님이 구축한 세계관이 무척 공고해서 19금적 요소들이 그다지 눈에 거슬리진 않는다.
소니픽처스에서 판권을 샀다는데 언제 영화로 나올지 기대된다. 남은 두 권 <오벨리스크의 문>과 <석조 하늘>도 천천히 다 읽고 기록을 남길 예정.
성혜령, 이주혜, 이희주 <소설 보다: 겨울 2024>
조해진 <빛과 멜로디>
작가님이 소설에서 다루고 싶은 주제가 너무 많아 보였다.
기본적으로는 반전과 난민 포용의 메시지가 저변에 깔려 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종군 사진작가로 활동하다 다리를 잃은 주인공의 오래전 친구,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다른 작가, 영국에서 각 전쟁의 난민을 수용해 주는 고마운 분, 이 모든 이야기를 서술해 주는 잡지사 기자인 주인공과 그 주인공을 이해할 듯 말 듯하는 주인공의 임신한 아내, 주인공과 오래전 친구의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등장인물과 배경 사건이 너무 많아서 산만한 느낌이었다. ‘이래도 세계평화를 외치지 않을 거니?’라고 멱살을 잡혀 이리저리 흔들린 기분이랄까.
사라 바론 <로봇 드림>
멍멍이와 로봇으로 그려졌지만 연인 사이로 가정해 보면, 한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다가 헤어지게 된 후 다른 사람을 만나는 그 사람을 아련하게 바라보는 모습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대사는 한 마디도 없지만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들의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
테스 게리첸 <스파이 코스트>
은퇴한 60세의 CIA 요원이 어느 시골에 거처를 마련해 닭을 키우며 조용히 살고 있다. 그 마을은 워낙 사람이 없는 시골 마을이라 몇몇 CIA 요원들이 정체를 숨기고 조용히 노후를 보내려고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살고 있는 곳이다. 그들은 종종 모여서 사는 이야기나 나누면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주인공의 집 앞에 시체가 하나 놓이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전직 요원들에게 비상이 걸린다. 은퇴한 요원들은 조금씩 사건을 파헤치면서 주인공이 20여 년 전 과거에 연루된 작전이 매끄럽게 끝나지 않아 신분이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 와중에 주인공의 옆집에 사는 일반인 소녀가 납치되고... 그러면서 20년 전으로 돌아가 그 작전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는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본 시리즈만큼 큰 음모와 과격한 액션은 없어도, 은퇴한 요원들의 사건 해결이라는 소재가 흥미로워 재미있게 읽었다. '짜잔!' 하고 반전 요소가 등장하긴 하는데, 그렇게 놀랍지는 않다.
크리스티안 뤼크 <자살의 언어>
어쩐지 날씨가 춥고 햇볕이 모자라면 우울증이 심해져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 같은 이미지를 우리 머릿속에 각인시켜 준 북유럽 국가들. 그중 대장격인 스웨덴의 의사 선생님이 쓴 책이다.
아직 반도 못 읽었는데, 리더스 앱에 '읽는 중'이라고 표시했더니 달력에 떠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이 자칫 자살이라는 행위가 사람들에게 선택 가능한 옵션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에 자살 관련 기사에서 해당 표현을 쓰지 말자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 자살은 선택이 아니며, 다른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되는 행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한 유가족의 생각은 다르다. 자살한 사람이 남겨진 선택지가 없는 사람으로 위축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살을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관점을 통해 선택으로 존중하는 것은, 자살을 실수로 보는 것과 차이가 있다. 항상 선택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고 선택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관점이다.
"만약 지금 제 아들이 여기에 있다면 말이죠.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거라고 제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엄청나게 화를 낼 겁니다."
사회적 관점과 유가족의 관점이 이토록 다르기에 조금 더 생각할 여지를 준다. 책을 좀 더 읽고 글을 써보겠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교과서에 실린 소설. 대학생 때 읽어보고 다시 집어들어 읽어봤다. 개발의 미명 하에 철거되는 달동네의 모습은 50년 뒤에도 여전히 전세사기로 전재산을 날리는 일이 허다한 원룸촌으로 유지되고 있다. 주인공 가족 구성원들의 (자기)파괴적 행동들은 OECD 최고의 자살률로 유구한 전통을 잇고 있으며, 노조 탄압과 환경 파괴는 하청을 통한 위험의 외주화와 무분별한 탄소배출로 얼굴을 바꿨다. 여전히 세상은 노동자를 조금 더 은밀한 구조 속에 밀어넣고 착취하고 있다. 정치와 재계와 언론이 유착해 있으니 이 공고한 구조를 바꿀 동력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 현장에서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수천 명이 죽고 나서 겨우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었으나, 현장에서 아무리 사람이 죽어도 경영자는 쉽사리 처벌받지 않는다.
50년 전을 그린 책의 배경에서 변한 건 대통령을 선거로 직접 뽑게 됐고(계엄을 아무렇게나 내리는 건 여전하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