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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청안 에세이작가 Oct 25. 2019

고모의 죽음이 내게 남긴 것

   고모가 죽었다. 마흔 하나의 젊은 나이에 악성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모는 나이 앞에 ‘4’를 달자마자 사후세계에 묶였다. 그때 나는 고모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에 어린 나이였지만, 공기로 느낄 수 있었다. 고모의 죽음 무렵 우리 가족을 둘러싼 공기는 매우 진하게 혼탁해서 숨을 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내게 고모의 뇌종양은 최악의 질병이자, 무거운 공기의 아픔이었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형체에 대한 슬픔이었다.


   고모의 무덤 앞에서 우리 가족의 삶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아버지는 사랑하고 의지했던 누나의 죽음 앞에서 점차 상실감에 빠지고 무기력해졌으며, 세상과 절교한 사람처럼 방황했다. 그가 심연으로 빠져들수록 엄마의 고통도 깊어갔다. 그렇게 지낸 기간이 일 년은 족히 되는 것 같다. 그 사이에 누가 무슨 일을 벌이는 줄도 모르고 우리 가족은 방황의 늪에 빠져있었다. 고모의 죽음 이후 고모부는 반년이 안 되어 재혼했다. 그리고 일종의 동업관계였던 아버지와 고모부는 결별의 수순을 밟았다. 사실은 아버지가 맥을 못 출 때, 좋은 것은 고모부가 챙기고 나쁜 것은 아버지 앞으로 명의를 밀어주는 방식으로 사업을 갈라놓고 고모부가 도망간 것이었지만. 순식간에 벌어진 참사 앞에서 가족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나는 고모부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 부모님은 우리 가족의 경제적 풍요를 앗아간 그를 원망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아니다. 더 누리고 살았다면 글쎄. 어린 시절 내 성격은 냉혈한이 되기 쉬운 질감이었다. 고모부가 미리 내 인생에서 누릴 것들을 앗아간 덕분에, 나는 오히려 따뜻하게 자랐다. 준비물 크레파스를 챙겨 오지 않는 친구를 이해하게 되었고(나도 엄마가 맞벌이 전선에 뛰어들고 나서는 종종 준비물 챙기기를 잊곤 했다.) 나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의 삶이 ‘더 나은 삶’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고모부는 분명히 나보다 더 많이 가지고 살 것이지만 나보다 못한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의 욕심이 자신을 옥죄고 불행하게 만들겠지.      



   이것 말고도 내겐 탐욕의 아이콘인 고모부와 짧은 인생을 살다 간 고모, 그리고 나를 포함한 그 주변부를 통해 내가 배운 것들이 있다. 첫째,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다는 것. 아버지는 고모부를 믿었다. 그리고 아프게 발등을 찍혔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전부를 내어주고도, 그가 고모의 배우자로서 지켜준 마지막 모습만을 생각하며(고모부는 다른 여자를 좋아하면서도 끝까지 고모만을 사랑한 척 혼신의 연기를 다 해주었다.)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책임을 뒤집어쓰고 그 책임으로 고모를 그리워했다. 한 가지 사건으로 두 가지를 배운다. 두 명의 사람을 배운다.


   둘째,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것. 고모네 집에 갈 때마다 고모와 고모부는 그렇게 친해 보였다. 그 분위기가 우리 부모님이 평소 보여주는 모습과는 많이 달라서, 나는 “사랑해”의 그 사랑이 이런 것인가 보다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이 반년을 못 가더라.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고모부가 재혼한 그분은 고모가 죽음을 문턱에 두고 있을 때부터 집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제 곧 세상을 떠날 배우자 앞에서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고모가 그 사실을 모르고 떠난 것이 다행이다. 알았다면 세상 모든 연인들의 사랑 맹세에, 결혼의 서약에 핏빛 저주를 내렸을지도 모르겠다. 고모는 평생 고모부만 사랑했으니.


   셋째, 천륜도 인간의 의지 앞에서 무능하다는 것을 배웠다. 나의 고종사촌인 고모 딸과 아들은, 고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중학생이었다. 그때 나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나보다 훨씬 언니고 오빠인 그들의 이름만 생각해도 눈물이 흐르곤 했다. 어린 마음에 그들이 엄마 없이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이 걱정되고 슬펐나 보다. 그런데 그들은 이상하게도 내 고모인 친모의 존재를 빠르게 잊어갔다. 어느 날 고모네 집에 갔더니 어떤 분이 고모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 아픈 엄마가 몇 년을 꼼짝 못 하며 챙기지 못했던 것들을 ‘엄마 아닌 사람’이 챙기기 시작하니 의지가 되며 ‘엄마’처럼 여겼나 보다. 나는 고모부에게 느끼지 않았을 배신감을 그들에게 느꼈다. 친구가 이사를 가도, 직장동료가 이직을 해도 함께 한 추억이 별처럼 눈에 총총 박혀서 아련해지는 우리들인데, 하물며 엄마인데, 엄마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편 노력하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살려고 그랬을 거다. 엄마가 없으니까 엄마처럼 의지할 사람을 딛고 살려고. 어떻게든 살아내 보려고.      




   삶에서 두려움이 엄습 해올 때나, 참기 힘든 아픔이 나를 에워쌀 때 고모를 생각한다. 죽기 싫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과 토끼 같은 자식들을 두고 끔찍이도 죽기 싫었을 것이다. 그 아픈 형체의 슬픔을 기억하고 나는 노트에 이렇게 쓴다.

   “우리 가족만 생각한다. 나는 해낸다. 살아낸다.”









***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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