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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utiPo Jul 18. 2017

[Part 2] 힐링 푸드, 엄마가 해주던 닭도리탕

[Part 2 : 미친여자 널뛰기 하듯, 요동치는 직장생활]

2016.01.31(일) / 회사를 떠나기 356일 전.


'닭도리탕'이 '닭볶음탕' 또는 '닭매운탕'으로 순화된 지도 벌써 한참이지만, 그래도 왠지 '닭도리탕'이라고 해야만 어릴 때 엄마가 해주던 그 맛이 날 것만 같다. 일하시던 엄마가 출근 전 후다닥 해놓고 가시면, 학교 갔다 와서 가스불을 켜고 데워서 밥에 쓱쓱 비벼먹고 양념이 잔뜩 묻어난 감자도 두개쯤 더 먹었던 그 얼큰한 음식 말이다.





몸이 아프니까 마음도 약해진다. 며칠을 약기운에 취해 밤낮없이 신생아처럼 잠만 잔 것 같다. 항생제가 말을 좀 듣고 진통제가 없어도 살만해지고 나서도, 집중력이 흐려져서 쉬운 책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아픈 건 웬만큼 나았는데, 여전히 축 늘어져 있었던 것은 그냥 지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새 회사 생활을 시작한지 만으로 2년, 3년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나'는 점점 희미해지고, 야무지고 성실하고 밝은 신입사원의 가면을 쓴 알 수 없는 누군가만 남았다. 커피와 핫식스를 번갈아 들이키며, 이미 바닥을 친 에너지를 사채 쓰듯이 쥐어짜서 끌어다 쓰고 나면, 한밤중에는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누워 벌건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다가 파산한거다. 더이상 끌어다 쓸 수 없을 만큼 온 정신과 육체가 너덜너덜해진 것이다.




그래도 며칠 쉬고 정신을 좀 차리고 나자 또 몸이 근질근질했다. 내 옷도, 책도 하나 없는 본가에서 이렇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오래 머물렀던 적이 언제였던지. 늘 하루나 이틀밤을 묵고 나면 바쁘다는 말만 남기고 자취방으로 돌아가기 급급했었다. 답답함에 바람을 쐬고 싶어서 엄동설한에 괜히 집앞 마트에 나가 이것저것 장을 봐왔다.그리고 가족들이 각자 볼일을 보러 떠나고 혼자 남은 집에서 요리를 해먹었다.


깔끔하고 매콤한 닭도리탕을 하려면, 닭을 우유에 재워 잡내를 빼고, 끓는 물에 데친 후에 닭 껍질을 미리 벗겨야 한다. 그리고 담백한 살코기만 남은 닭고기를 양념에 미리 재워둔다. 고구마는 풀어져서 국물이 달아지니까 넣지 않는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감자는 많이 넣는다. 매콤한 맛은 고춧가루와 청양고추로, 단맛은 고추장과 약간의 설탕으로 낸다. 조미료는 넣지 않는다. 당면은 덜 불린 상태에서 넣고 끓여야 국물 맛이 충분히 밴다.


몸이 아프니까 마음도 약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삶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평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내 들숨과 날숨, 타박타박 땅을 디딜 때의 진동, 또각또각 도마에 칼질 소리, 보글보글 닭도리탕이 끓는 소리 그리고 매콤한 냄새. 그런 것들이 마치 영화 속에서 클로즈업 된 것처럼 생생하고 크게 느껴진다.


대학생 때,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어느 날 교수님이 내게 이런 위로를 했었다.


"집에 가서 며칠 푹 쉬어요. 고슬고슬 밥도 지어 먹고."


그 때는 마음이 힘든 것과 밥 짓는 것이, 또 밥 먹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했었는데 그 말 뜻을 몇 년이 지난 이제야 알 것 같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분주하게 재료를 손질하고 끓이고 맛을 보는, 내 삶의 가장 본질적인 그 일련의 행위에 온 마음을 쏟다 보면, 세상에 모든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희미하게 잊혀지더라.







취준생부터 퇴사 이후 새출발까지, <나의 똥같은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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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 : D-Day, 회사를 나서다 (☞ 첫 글 보기)
Part 1 : 취업 준비  (☞ 첫 글 보기)
Part 2 : 직장 생활  (☞ 첫 글 보기)
Part 3 : 퇴사 이후  (☞ 첫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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