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autiPo Oct 23. 2017

[Part2] "넌 생각이 너무 많아"-1

[Part 2 : 미친여자 널뛰기 하듯, 요동치는 직장생활]

2016.10.24(월) / 회사를 떠나기 88일 전.



나는 어려서부터 책을 무척 좋아했다. 집에 있는 책을 모조리 다 읽고도 모자라서, 고작 다섯살 꼬마가 친하지도 않은 옆집 친구집에 놀러가 하루종일 눌러앉아 새로 산 전집을 다 읽어버리곤 했다. 그 집 아주머니께서 나를 기특하게 생각하시면서도, 정작 그 집 아들은 책을 읽지 않아 약올라 했다는 이야기는 우리 엄마의 단골 무용담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소설책에 푹 빠져 살았다. 동네 책방에서 열 몇권이 넘는 <퇴마록> 시리즈를 전부 빌려서 쌓아놓고 밤새도록 읽기도 했다. 여하튼 나는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시험 전날에도 소설책에 코를 박고 있는 아이였다.


대입을 앞두고는 논술이 한참 이슈였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논술을 공부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던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따위의 겉멋 가득한 책을 꾸준히 읽었다. 당시 내게는 다소 어려운 책들이었지만, 책을 읽고 고민하고 글을 쓰고 토론을 하는 그 일련의 과정은 즐거웠다. 그리고 나의 고등학교 생활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했다.


대학에 갔다. 필수로 들어야 하는 글쓰기 수업이 많았다. '글쓰기'라고 이름붙지 않은 수업이더라도, 대부분은 일정한 지식을 바탕으로 본인의 의견을 개진해나가는 능력을 요구했다. 이 사회의 문제와 그 해결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도록 요구받았다. 문제를 날카롭게 분석하여 핵심을 찌르는 글을 쓰면 좋은 학점을 받았고, 박수를 받았고, 칭찬을 받았다. 물론, 세상에는 아주 똑똑한 친구들이 많았고 나는 그렇지 않았지만.


한글을 뗀 이후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아주 많은 책을 읽었고, 약간의 글을 썼다. 수준이 그리 높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빽빽한 활자 속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배웠다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했다. 나와 함께 동화책을 읽고, 신문 사설을 읽고, 논술 공부를 하고, 토론을 하던 친구들과 나는 모두 사회인이 되었다. 아무개는 공무원이 되었고, 아무개는 언론인이, 아무개는 법조인이, 아무개는 회사원이 되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고민하기'와 거리가 먼 직업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가끔 보고서를 쓰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글쓰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읽고 쓰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주말이면 다 읽지도 못할 책들을 잔뜩 싸들고, 내가 좋아하는 카페 구석진 자리에 앉아 혼자 책장을 뒤적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다. 양질의 텍스트에서 얻는 지적인 즐거움이 절반. 나머지 절반의 즐거움은 왠지 나 자신이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지적 허영심 같기도 하다.




직장에서는 주어진 일을 해서 월급을 받고, 고민하기와 글쓰기는 그 월급을 가지고서 퇴근 후에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돈을 내지 않고 돈을 받아가며 하고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야근이 많아서도 아니고, 월급이 적어서도 아니다.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넌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그냥 편한대로 살아"

"피곤하게 굴지 마"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그런다고 월급 더 주니?"

"그렇게 하나하나 사정 봐주면 일이 되겠니?"

"원래 다 그런거야"

"그래봤자 소용 없어"


이 조직은 내게 생각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복잡한 고민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면 언제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이 조직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이기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먹고사니즘' 만 생각하는 사람이 이긴다.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고민은 오로지 하나다. 상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사의 마음을 사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떻게 하면 내가 욕을 먹지 않을지. 그리고 이곳에서 나의 목숨을 조금 더 보전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나는 나다움을 모두 지워가며, 인간다움을 모두 지워가며 이 곳에서 더 버틸 자신이 없어졌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취준생부터 퇴사 이후 새출발까지, <나의 똥같은 날들>


☞ 이전 편 보기

☞ 다음 편 보기



Part 0 : D-Day, 회사를 나서다 (☞ 첫 글 보기)
Part 1 : 취업 준비  (☞ 첫 글 보기)
Part 2 : 직장 생활  (☞ 첫 글 보기)
Part 3 : 퇴사 이후  (☞ 첫 글 보기) 


https://www.instagram.com/beautipo_official/


매거진의 이전글 [Part2] 모두가 일하지만 아무도 일하지 않는 조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