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열 May 29. 2018

설탕으로 맥주를 덜 달게 하다

5월의 맥주, 트라피스트 에일: 최고의 맥주를 위한 수도승의 기도

어느덧 지금까지 일곱 달에 걸쳐서 '이 달의 맥주'를 소개드렸습니다. 그 중 무려 네 달이나 독일의 맥주가 선정된 것은 물론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동안 프랑스는 무얼 하고 있었나요?


미식의 나라라는 프랑스지만, 맥주에 있어서는 놀라울 만큼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이 역시도 우연이 아닙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예로부터 와인에 만족해 왔기 때문입니다.


벨기에는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네덜란드와 함께 끼어있는 아담한 나라입니다. 맥주의 나라 독일과 와인의 나라 프랑스의 사이에서, 마치 와인을 닮은 독하고 향긋한 맥주가 발전한 것 또한, 우연은 아닐 겁니다.



트라피스트 맥주란?


프랑스 마을 시토(Citeaux, 라틴어 Cistercian)에는 성 베네딕트가 정립한 수도원 규율에 따라 생활하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 중 라 트라프La Trappe 수도원의 원장님은 17세기 어느 날, '요즘 신부들은 (내 밑으로 다) 빠졌다'며 규율을 엄격하게 재정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에 따라 엄률시토회(Order of Cistercians of the Strict Observance)가 탄생했습니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1892년이 되어, 이들은 라 트라프 수도원의 이름을 따 '트라피스트Trappist' 수도회라는 이름으로 교황의 승인을 받아 독립했습니다.


'트라피스트'의 어원이 된 라 트라프 수도원의 맥주


꼭 트라피스트나 시토 수도회가 아니더라도, 유럽의 수도승들이 맥주를 만드는 일은 아주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 (관련글 : 이 독한 맥주도 누군가에게는 생명이었다) 베네딕트 규율의 48장에는 '손으로 일하며 사는 수도승들이 진실하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수도승들은 기도하는 틈틈이 맥주 뿐만 아니라 치즈나 빵 등을 만드는 수공업을 하며 살았고, 그렇게 만든 제품을 팔아서 번 돈으로 수도원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맥주를 만든다고 다 타락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맥주를 만드는 것은 이들의 본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바쳐 같은 일을 하고, 정성을 다해 일을 하며, 수익을 남기겠다는 욕심도 없기 때문에 수도승들의 제품은 품질 면에서 바깥 세상의 물건보다 뛰어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품질에 더해 왠지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청렴한 이미지, 아무데서나 만들지 못한다는 희소가치가 더해져,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만든 맥주'에 대한 인기가 크게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비슷한 스타일의 맥주를 만들어 '트라피스트 맥주'라는 이름을 붙인 모방품들도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수도승들은 본래 굉장히 자비로운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도 자신들이 열심히 쌓아온 트라피스트 맥주의 명성에 되도 않는 맥주를 가지고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미웠나 봅니다. 모방품에 대해 고소도 해 보고 이런저런 대응책을 강구하던 '진짜' 트라피스트 수도승들은 1997년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ITA)를 조직하고, 몇 가지 조건을 만족하고 협회의 허락을 받은 양조장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정품 보증 마크를 만들어 트라피스트 맥주의 명성을 보호하기로 합니다.


협회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1. 맥주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담장 안에서 양조되어야 하며, 수도승들이 직접 만들거나 수도승들의 감독 하에 만들어져야 한다.

2. 맥주 양조는 어디까지나 수도원의 부수적인 일이어야 하며, 양조 과정이 수도원의 생활 방식에 부합해야 한다.

3. 맥주 양조는 수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맥주를 통한 수입은 수도승의 생활과 수도원의 유지를 위해서만 쓰이며, 남는 것은 기부해야 한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양조장 중에서도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의 심사를 거쳐 승인을 얻고 지속적인 감독 하에 있는 양조장만이 맥주에 'AUTHENTIC TRAPPIST PRODUCT' (ATP) 정품 보증 마크를 넣을 수 있습니다.


트라피스트 정품 인증 로고


이 자격은 한 번 획득했다고 해서 영원히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라 트라프La Trappe 양조장의 경우, 수도승들의 노쇠로 양조장의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지자 벨기에의 라거 맥주 스텔라 아르투아를 만드는 대기업 AB-InBev에 라이센스를 내어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업적인 행보를 이유로 1999년부터 2005년 관계 재조정을 이루기 전까지, 라 트라프 양조장은 트라피스트라는 이름이 유래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ATP 마크의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또한, 프랑스의 Mont des Cats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양조장이 파괴되는 바람에 100년 가까이 지난 2011년에야 맥주를 다시 생산했지만, 양조장을 복구하지 않고 시메Chimay 수도원의 수도승들을 통해 대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맥주에 ATP 마크를 넣지 못하고 있습니다. ITA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 양조장의 맥주는 '트라피스트'라는 단어를 라벨에 사용할 수는 있으나 ATP 마크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전세계적으로 170개에 달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ATP 마크의 자격을 획득한 곳은 현재 12곳 뿐이며, Mont des Cats 수도원을 제외한 11곳만이 실제로 맥주에 ATP 마크를 넣고 있습니다. 또한 이 명단은 수시로 바뀌며, http://www.trappist.be/en/pages/trappist-beers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맥주를 트라피스트 맥주라고 부르는지 알아보았다면, 이제부터 트라피스트 맥주가 어떤 맥주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사실 트라피스트 맥주라는 이름은 위에 언급된 '공인 트라피스트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를 총칭하기 때문에, 이 중 어딘가에서 어느 날 신의 계시를 받아 필스너, IPA, 혹은 대X강 맥주를 만든다고 해도 그 맥주는 트라피스트 맥주가 맞겠습니다. 다행히 아직까지 그런 짓을 한 트라피스트 양조장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트라피스트 맥주가 어떤 맥주인지 안전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엥켈Enkel

트라피스트 에일이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전부터, 벨기에의 수도원들에서 만들던 맥주가 있습니다. 수도승들이 간단히 만들어 자기 자신과 손님에게 제공하는 평범한 맥주, 엥켈Enkel입니다. 엥켈은 영어로 따지면 싱글single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물론 이는 후대에 지어진 이름일 것입니다. 당시 수도승들은 대략 '맥주' 혹은 '음료' 정도로 이것을 일컫지 않았을까요?


초기의 엥켈은 3도 내외의 약한 알코올 도수를 가지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다소 애매한 음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부족한 정체성 때문인지, 지금은 시장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스타일입니다.


두벨Dubbel

벨기에 맥주를 논할 때 상당히 자주 쓰이는 단어로, 많은 분들이 친숙하신 이름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벨기에 맥주의 한 종류인 두벨Duvel과 혼동하고 계신 것은 혹시 아닌가요? 두벨Duvel은 악마devil에 해당하는 단어로, 더블double에 해당하는 두벨dubbel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며, 심지어 두벨Duvel은 두벨dubbel에 해당되지도 않습니다. 노리고 지은 이름일까요?


두벨을 처음 만든 것은 공인 트라피스트 양조장 중 하나인 베스트말레Westmalle 수도원입니다. 기존에 일상적으로 마시던 도수 낮고 연한 색깔의 엥켈 대신, 보리를 두 배로 많이 넣고, 벨기에 특유의 맥아와 효모를 사용해 맛이 달고 진하며, 도수도 6% 이상으로 높은 갈색 맥주를 만들었습니다. 1850년대 처음 만들었지만 두벨이라는 이름으로 세간에 알려진 것은 1920년대의 일이었고, 곧 트라피스트 에일을 넘어 벨기에 에일 맥주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두벨을 만든 베스트말레Westmalle



트리펠Tripel

1919년, 벨기에의 법무장관 에밀 반데르벨데는 알코올 남용을 근절하기 위해 증류주 등 독한 술의 판매를 제한, 금지하는 반데르벨데법을 통과시킵니다. 미국의 대대적인 금주령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증류주가 아닌 맥주나 와인은 이 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벨기에 사람들은 맥주를 더욱 독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두벨을 발명한 베스트말레Westmalle 수도원에서 만든 것이 바로 두벨보다도 더 독한 트리펠Tripel입니다.


트리펠은 두벨보다 한 단계 높은 7.5%~9% 정도의 높은 알코올 도수를 자랑하는데, '조금 더 센 두벨'에 지나지 않고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두벨과 대비되는 밝은 색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맥주의 두 배에 달하는 높은 도수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밝은 색과 가벼운 맛을 가진 맥주입니다.


쿼드루펠Quadrupel

트리펠 다음으로 무엇이 등장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지금으로서 가장 높은 단계의 알코올 도수와 깊이를 자랑하는 트라피스트 에일, '네 배 짜리 맥주' 쿼드루펠입니다. 트리펠과는 다시 한 번 대조적으로, 두벨과 비슷한 어두운 색깔을 띱니다. 사실 상표명에 직접 쿼드루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1991년 이 맥주 스타일을 창조한 라 트라프La Trappe 양조장 뿐이지만, 다른 트라피스트 양조장에서 뒤이어 만든 '트리펠보다 한 단계 높은 도수와 어두운 색깔'의 트라피스트 에일을 쿼드루펠이 아니면 딱히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요?


참고로, 트라피스트 양조장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두벨, 트리펠, 쿼드루펠 따위의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라벨과 병뚜껑의 색깔, 혹은 간단한 숫자로 맥주를 분류하는 검소한 관행이자 미니멀한 디자인을 선호합니다. 시메Chimay 양조장은 자신들의 두벨-트리펠-쿼드루펠을 각각 빨강-하양-파랑의 라벨로 표현하며, 로슈포르Rochefort(아래 사진 참조) 양조장에서는 빨강-초록-파랑과 함께 6-8-10의 숫자를 부여해 보리 함량, 알코올 도수, 그리고 가격의 오름차순을 표현합니다. (단, 로슈포르의 8번 맥주는 6, 10과 비슷하게 어둡기 때문에 전형적인 트리펠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트라피스트 양조장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두벨, 트리펠, 쿼드루펠 따위의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라벨과 병뚜껑의 색깔, 혹은 간단한 숫자로 맥주를 분류하는 검소한 관행을 따릅니다.




벨기에 '수도원' 맥주


여태껏 벨기에 수도원 맥주에 대한 얘기를 해 놓고, 제목이 왜 이러냐고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벨기에 '수도원' 맥주가 아닌, 벨기에 '트라피스트' 맥주였습니다.


물론 트라피스트는 수도원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트라피스트 맥주는 위에서 언급된 기준에 따라 공인된 곳에서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트라피스트 맥주를 모방, 혹은 변형해 만든 비슷한 스타일의 수많은 맥주에는 벨지안 에일Belgian ale, 혹은 애비 에일Abbey ale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애비Abbey가 수도원이라는 뜻이니, 다른 수도원에서 만들거나, 아예 세속적인 양조장에서 만들어 트라피스트 정품 인증을 받지 못한 트라피스트 스타일의 에일을 수도원 에일이라고 에둘러 표현하는 것입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는 위에서 소개드린 두벨, 트리펠, 쿼드루펠을 기가 막히게 만들지만, 꼭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만 이 에일을 맛있게 만들라는 법은 없거든요.


이러한 벨지안 에일, 혹은 애비 에일 중에는 위에 소개드린 2~4단계 중 하나를 충실히 따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기도 합니다. 대개 이런 경우에는, 'Belgian (   ) ale' 이라고 라벨에 명시함으로써 이 맥주가 대략 어떤 스타일의 맥주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예를 들어, 'Belgian brown ale'이라고 써 있다면 평범한 도수(5~6% 내외)의 어두운 벨지안 에일, 즉 두벨과 비슷한 스타일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슷하게, 'Belgian golden strong ale'은 트리펠에 해당되는 맥주일 것이며, 'Belgian blonde ale'이라면 트리펠처럼 색은 밝지만 도수는 두벨 이하로 낮은 가벼운 맥주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느 맥주에나 도수는 정확히 명시되어 있으니 조금 더 안전한 선택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벨지안 에일이라고 불리우는 맥주들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크게 발전해 왔으며, 지금도 몇 되지 않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아주 훌륭한 벨지안 에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일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는 자신들의 상품에 대한 신비주의 및 희소성을 극한으로 불러일으키는 전략을 택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쿼드루펠 스타일의 베스트블레테렌Westvleteren12로, 많은 사람들에게 지상 최고의 맥주로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하지만 어떤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여느 잘 나가는 크래프트 양조장 부럽지 않은 대량생산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트라피스트 브랜드로는 시메Chimay가 있습니다.


한편, 특히 기술이 발전한 요즘에는 공인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만들어야만 제대로 만든 맥주라는 편견은 잘못되었습니다. 검증 단계를 하나 덜 걸쳤을 뿐, 트라피스트 에일이 아닌 '애비 에일' 중에서도 훌륭한 맥주가 많으니, (트라피스트 에일이 아닌 훌륭한 쿼드루펠의 대표격으로 세인트 버나두스Saint Bernardus Abt12 맥주가 꼽힙니다) 기회와 자원이 되신다면 얼마든지 다양한 벨지안 에일을 구입하셔서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 전체적으로 도수가 높으며 호불호가 갈리는 스타일이니 섣부른 대량구매는 삼가셔야겠습니다.)


트라피스트 에일은 아니지만 이 애비 에일은 쿼드루펠 스타일의 걸작으로 꼽힙니다.



벨기에 에일의 비밀 아닌 비법


트라피스트 에일, 나아가 수도원 에일, 벨지안 에일을 도수와 색깔에 따라 열심히 분류해 보았지만, 그 모든 분류를 관통하는 벨지안 에일만의 맛이 있습니다. 보통 건포도, 말린 자두 느낌의 진한 과일향과 약간의 시큼함, 높은 알코올 도수, 그리고 비교적 가벼운 바디감 등으로 묘사되는데요. 이 모든 것들은 구수한 보리의 단 맛과 대비되어, 와인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러한 특징의 원인은 복합적이어서 한 마디로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건포도, 자두 등으로 묘사되는 진한 과일 향(J. Frane)은 두벨, 쿼드루펠 류의 어두운 벨지안 에일에 들어가는 Special B라는 이름의 맥아 때문이기도 하고, (Ontolchik의 자료에 따르면 쿼드루펠에 해당되는 '벨지안 다크 스트롱 에일'의 89%에 이 맥아가 사용되었습니다) 벨기에식 밀맥주인 벨지안 윗Belgian Wit 스타일의 맥주에서도 드러나다시피 (관련글 : 세상의 모든 밀맥주)벨기에에서 사용되는 에일 효모가 강한 향을 내뿜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트라피스트 에일, 벨지안 에일 맥주의 특징은 맥주에 설탕을 넣는 것입니다.


사실 설탕sugar이라는 물질에도 굉장히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백설탕부터 덜 정제된 갈색 설탕, 혹은 흑설탕은 물론, 보리를 맥아화할 때 녹말이 분해되어 나온다는 포도당, 스위트 스타우트에 들어갔던 유당, corn sugar라고도 불리는 덱스트린 등, 설탕sugar은 당류를 총칭하는 꽤 넓은 뜻의 단어입니다. 벨지안 에일에는 특징적으로 'Belgian candi sugar'라는 이름의 설탕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이 물질은 정제되지 않은 사탕무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 중 어떤 설탕이 벨지안 에일에 들어가는지는 개별 맥주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겠지만, 대체로 성립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효모의 먹이가 될 수 있는 단당류, 이당류 등의 단순당simple sugar을 넣어준다는 점입니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맥주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차적인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보리를 많이 넣을수록 높은 도수의 맥주가 되겠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당연히 맥주의 맛도 그만큼 진해질 것입니다. 맥주를 만들기 위해 맥아화한 보리에는 효모의 먹이가 될 수 있는 단순당, 발효당도 있지만, 그럴 수 없는 비발효당도 존재합니다. 보리를 많이 넣을수록 발효당이 많아져 발효의 산물인 알코올도 늘어나겠지만, 동시에 결과물인 맥주에 남아있는 비발효당도 많아지겠죠. 이런 원리로 만들어진 맥주가 바로 '보리가 듬뿍 들어간 맥아의 정수' 도펠복입니다. (관련글 : 이 독한 맥주도 누군가에게는 생명이었다)


반면, 효모의 먹이가 될 수 있는 단순당, 혹은 발효당을 따로 맥주에 넣으면 같은 양의 보리로도 더 높은 도수의 맥주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그 결과, 단순당을 첨가해 만든 맥주는 같은 도수의 일반 맥주에 비해 최종 산물인 맥주에 남아있는 당이 오히려 적어, 역설적으로 덜 달고 덜 묵직한 맥주가 됩니다.


여기서 맥주가 묵직하다는 표현은 맥주의 '바디감'을 말합니다. 당이 많은 맥주는 입 안에 들어가면 침샘을 자극해 뭔가를 많이 먹은 듯한 느낌을 주며, 반대로 당이 적은 맥주는 쌉싸래한 맥주가 입 안을 거쳐가면서 알코올이 증발해 입 안이 말라버린 듯한 느낌을 줍니다.

바디감이 가벼운 후자의 느낌을 '드라이'하다고도 표현하는데, '아사히 슈퍼 드라이' 또는 하이트에서 나온 '드라이 피니시 d' 등의 맥주가 이 느낌을 극대화한 맥주입니다.

한편, 당이 많을수록 맥주의 비중, 즉 부피 대비 무게가 실제로 무거워지기 때문에, 묵직하다는 표현은 상당히 과학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트라피스트 에일은 위와 같은 원리를 이용해 높은 알코올 도수에 비해 맥주에 남아있는 비발효당을 줄임으로써, 찐득하지 않은 깔끔하고 드라이한 느낌을 줍니다. 설탕을 넣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절제된 단 맛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보리와 효모가 주는 복잡미묘한 풍미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와인이 부럽지 않은 이유입니다.


트라피스트 에일은
설탕으로써 비발효당을 줄여
절제되고 고급스러운 단 맛을 냅니다



여기서, '높은 알코올 도수에 비해'라는 부분을 놓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때론 소독제 역할을 하는 알코올의 농도가 높아질수록 효모가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 되기 때문에, 도수가 높아질수록 효모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당을 남겨두게 됩니다. 따라서, 설탕을 넣은 트라피스트 에일은 비슷한 도수의 맥주보다는 단 맛을 낮출 수 있겠지만 애초에 보리가 별로 들어가지 않은 아사히, 기린 등의 정말 드라이한 맥주에 비하면 꽤 단 맛이 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리와는 달리 거의 단순당으로만 이루어진 포도를 발효한 와인에서도 단 맛을 느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 달에 한 종류씩, '이 달의 모범맥주'와 함께 진하고 시원한 맥주 이야기를 배달합니다.

이 시리즈는 대한민국 공군 교양카페 <휴머니스트>에 <이 달의 모범맥주>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전글 바로가기
여는 글: 수제맥주? 맥주는 원래 수제였다.
10월: 옥토버페스트가 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10월: 뮌헨 맥주가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은 방법

11월: 모두가 겉으로만 아는 라거와 에일의 차이

11월: 영국, 에일, 그리고 IPA의 역사

12월: 이 독한 맥주도 누군가에게는 생명이었다

1월: 흔한 맥주라고 다 싸구려는 아니다

2월: 커피 대신 맥주로 스타벅스를 차려볼까

2월: 기네스의 질소충전포장: 맥주 거품의 과학

3월: 맥주가 너무 맛있어서 법에 구멍이 뚫렸다

4월: 세상의 모든 밀맥주


참고문헌
번스타인 (2015) "맥주의 모든 것" 푸른숲
M. Ontolchik "Belgian Dark Strong Ale", http://www.beersnobs.org/recipes_tools/
J. Frane "Specialty Grains: Caramel and Roasted Malts" https://byo.com/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의 모든 밀맥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