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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열 Jun 27. 2018

IPA, 홉으로 맥주를 그리다.

6월의 맥주 IPA: 세계 맥주의 지형을 바꾼 쓴 맛

바야흐로 크래프트 맥주 붐입니다.


사람들이 좀 모인다 싶은 곳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수제 맥주'라는 간판을 단 가게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대형마트에 가면 이름도 생소한 수입 맥주가 할인 딱지를 붙이고 있지요. 마치 '누가 아직도 수제 맥주 아닌 맥주를 먹느냐'며 은근히 깔보는 듯도 합니다.


이러한 트렌드 하에 수입 맥주, 비싼 크래프트 맥주의 인지도는 날로 치솟는 중입니다. 저도 물론 여기에 한 몫 보태보려고 애쓰는 중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는 무엇일까요? 정확한 통계는 잡히고 있지 않지만 (중앙일보, 2017) 카스와 하이트가 각각 1, 2위라는 데에는 별다른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천편일률적이고 싱겁다는 그 맥주들은 예나 지금이나 잘만 팔리고 있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상황을 두고, 말 오줌과 같은 극단적인 비유까지 사용해가며 한국의 맥주 시장을 자조하지만, 그렇게 부끄러워하실 일도 아닙니다. 가까운 과거에 미국은 더 심했었거든요.


20세기 초반, 금주령으로 술 마시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던 시대를 지나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군림한 미국에서는, 맥주 역시도 극단적인 규모의 경제에 의한 대기업 중심의 대량생산품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 말, 드넓은 미국 땅에 양조장이라고는 44개가 전부였습니다. (참고문헌: Brewer's Association) 물론 그 중에서도 소수가 대부분의 생산량을 차지했겠지요.


뭐든 한 쪽으로 너무 치우치면 반대쪽이 반등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몇몇 미국인들은 공장에서 만들지 않은 맛있는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집에서 직접 맥주를 양조하는 홈브루잉homebrewing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발전해 작은 양조장, 현대적 의미의 마이크로브루어리microbrewery가 생겨나기 시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이크로브루어리들은, 옛날 영국에서 인도로 수출하기 위해 만들었던 인디아 페일 에일, 줄여서 IPA를 재해석한 맥주가 유행하면서 급성장의 탄탄대로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요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수제 맥주' 입간판은 바로 이것의 결과물입니다.



새로 만든 IPA


인디아 페일 에일, IPA는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영국에서 인도에 맥주를 보내기 위해 방부제 역할을 하는 홉과 알코올을 잔뜩 넣어 매우 쓰고 세게 만든 에일 맥주입니다. 그리고 IPA를 개발한 악덕 사업가 조지 호지슨의 횡포에 대항해, 버턴Burton 지방에서는 황산염 가득한 물로 더 맛있는 IPA를 만들어 유행시켰고, 시간이 흐르고 주세 정책이 바뀌면서 알코올 도수를 다시 낮춰 적당히 쓰면서도 고소하게 만든 맥주가 바로 영국의 페일 에일이었습니다. 이 맥주가 탄생하게 된 우여곡절은 11월의 맥주 편에서 자세히 소개된 바 있습니다.


한편,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스탠포드를 갓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양조장 앵커Anchor를 인수한 프릿츠 메이택Fritz Maytag은 어디선가, 옛날 영국에서는 맥주를 만들 때 다 만든 맥주에 홉을 넣기도 하더라는 소문을 듣고, 페일 에일을 그렇게 양조해 보겠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금 후에 소개할 드라이 호핑 방법입니다.


그런 메이택에게는 우연찮게도 홉을 재배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미국 최대의 홉 산지인 오리건Oregon 주에서 홉을 재배하던 그 친구는, 오리건 주립대학에서 최근 새로 개발했다며 케스케이드cascade라는 품종의 홉을 메이택에게 추천해 주었습니다. 친구에게서 홉을 공급받은 메이택은, 페일 에일을 양조하고는 다 만든 맥주에 케스케이드 홉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크래프트 맥주의 시초, 리버티 에일


리버티 에일Liberty ale이라는 이름으로 1975년 출시된 이 맥주는 싱거운 저칼로리 맥주가 유행하던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는 엄청난 쓴 맛과 향의 맥주였습니다. 이토록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힘든 맛으로는 당장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없었지만, 서서히 이 치명적인 쓴 맛에 중독된 매니아들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뭘 원하는지, 우리가 만들어 주기 전에는 모른다"던 스티브 잡스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리버티 에일은 미국식 IPA 스타일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홉이란 무엇인가


이처럼 충격적인 쓴 맛을 만들어낸 홉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때가 왔습니다. 물, 맥아, 효모와 함께 맥주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4개 요소 중 하나로, 맥주를 상하지 않게 해 주는 천연 방부제로, 그리고 필스너의 성공비결 중 하나인 깔끔한 쓴 맛을 내는 재료로 이전 편에서 여러 차례 홉을 언급했지만, 홉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 왔던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홉은 장미목 삼과에 속하는 식물이며, 사실 맥주에 넣는 것은 이 식물의 꽃 부분입니다. 물론, 보통 홉이라고 하면 이 꽃 부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참고로, 장미목 삼과에는 홉 말고도 한 가지 중요한 식물이 더 있습니다. 바로 대마입니다. 이런, 그래서 이렇게 끊기가 힘들었군요.



꽃이라기보다는 초록색 솔방울같이 생긴 주제에, 자기도 꽃이라고 꽤 강렬한 향을 내뿜습니다. 이 향을 포함한 홉의 천연 화학물질은, 맥주에 넣었을 때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함과 동시에 보리맥아의 단 맛과 균형을 이루는 특유의 쓴 맛을 첨가해 많이 마셔도 물리지 않기 해 줍니다. 특히 이러한 위생적인 기능을 인정받아, 아무 풀이나 뽑아서 맥주에 넣던 중세 시대에 홉은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서 보리맥아, 물 외에 맥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재료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관련글 : 맥주가 너무 맛있어서 법에 구멍이 뚫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홉은 맥주 원료로서의 입지를 탄탄하게 다졌습니다.


홉이 정확히 어떤 맛을 내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이미 여러분은 엄청난 양의 홉을 드셔 보셨습니다. 국산 맥주를 비롯해 편의점에서 흔히 보이는 대부분의 맥주에서 나는 맛은 거의 대부분이 홉의 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나 (쉿, 어린 아이에게 맥주를 주는 것은 불법입니다) 술을 처음 먹는 젊은이들이 쓰기만 하다며 눈살을 찌푸리는 맥주 특유의 맛이 바로 홉의 맛입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사실 별로 간단하지 않습니다. 홉에는 굉장히 많은 품종이 있습니다. 수많은 품종의 개가 각기 다른 생김새와 성격을 가진 것만큼이나, 홉 역시도 품종에 따라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의 맛과 향을 냅니다. 독일, 체코 지방의 홉, 영국의 홉, 미국의 홉 등 품종의 출신 지역에 따라서도 맛이 크게 바뀌며, 비슷한 지역의 홉이더라도 미묘하게 다른 향을 내는 수많은 품종이 존재합니다.


심지어 여러 품종을 교배시켜 새로운 품종의 홉을 만드는 일도 매우 활발해, 위키피디아에 나오는 홉 품종만 해도 100개가 넘지만, 사실상 홉 품종의 다양성은 무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 IPA와 같은 맥주에 한 품종의 홉만이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적게는 두세 종류, 많게는 열 종류가 넘는 홉이 쓰이기도 합니다. 이 쯤 되면, 홉으로 그린 맥주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지요.



홉으로 맥주 그리기


그렇다면, 솔방울같이 생긴 식물의 꽃을 맥주에 어떻게 넣는 걸까요? 저는 맥주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전문적인 설명은 해 드릴 수 없지만, 기본적인 원리는 차를 우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맥주는 액체니까, 홉을 담궈놓고 우린 다음에 빼는 것이죠. 하지만, 더 세부적인 순서와 방법에 따라 몇 가지의 홉 넣는 방법, 호핑 테크닉hopping technique이 존재합니다.



먼저, 끓고 있는 맥아즙에 홉을 넣는 방법이 있습니다. 맥아즙을 끓이는 것은 곡물인 보리가 발효의 재료로 쓰일 수 있도록 맥아화하는 과정을 거친 후, 효모가 들어가 발효할 수 있는 액체 형태로 만들기 위해 물에 녹이는 과정인데요, 끓는 맥아즙에 홉을 넣는 방법은 넣는 타이밍에 따라 다시 한 번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홉의 주성분 중에는 알파산alpha acid과 홉 기름hop oil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알파산은 홉의 쓴 맛을 담당하는 성분이고, 홉 기름은 홉 특유의 향과 맛을 내는 성분입니다. 그런데, 홉을 오랫동안 끓이면 알파산은 이소알파산으로 변하면서 쓴 맛이 극대화되는 반면, 홉 기름은 휘발성이 높아 금방 날아가 버립니다. 따라서, 맥아즙에 홉을 넣고 팔팔 끓일 경우 그 홉은 맥주에 쓴 맛을 더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 되며, 반대로 마지막 10분 정도 이내에 홉을 넣고 금방 식히면 그 홉은 맥주에 맛과 향을 더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 됩니다. (Smith 2008)


홉의 품종마다 홉 기름이 내는 특유의 맛과 향도 천차만별이지만, 알파산의 함유량 또한 크게 다릅니다. 자연히, 알파산이 많이 들어있는 품종의 홉은 일찍 넣어 쓴 맛을 극대화하는 용도에 적합하고, 알파산이 적게 들어있는 품종의 홉은 늦게 넣어 향과 맛을 더해주는 용도에 적합합니다. 후자의 홉을 아로마aroma 홉이라고 부르며, 통상적으로 맥주에 대해 '어떤 홉을 써서 어떤 맛이 난다'고 말할 때는 바로 맥주에 쓰인 이 아로마 홉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이미 끓이고 식힌 후에 홉을 넣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통틀어 드라이 호핑dry hopping이라고 합니다. 홉을 넣은 후에 끓이지 않기 때문에 아로마 홉의 경우처럼 쓴 맛이 많이 우러나오지 않고 주로 맛과 향을 추가하는 기능을 하며, 맛을 내기 위해 필요한 홉의 양이 적어 비교적 효율적입니다. 드라이 호핑 중에서도 어떤 단계에 홉을 넣느냐에 따라 몇 가지 방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 중 많이 쓰이는 방법 중 하나로는, 1차적으로 발효가 끝난 뒤 숙성, 혹은 2차 발효를 거치러 들어갈 때에 홉을 티백과 비슷한 '홉백'에 넣어 맥주에 담구는 것입니다. 24시간이면 충분하고, 48~72시간 이후로는 더 오래 두어도 별 효과가 없으며, 2주 이상 오래 넣어두면 불쾌한 풀 냄새가 날 수 있습니다. (Stange 2015) 양조장에서 2차 숙성이 이루어진다면 양조가가 알아서 시간 조절을 잘 하겠지만, 때로는 맥주가 1차 숙성만을 거치고 생맥주용 케그에 포장된 후 유통되면서 2차 숙성을 거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 맥주를 바로 소비하지 않으면 케그가 2주 이상 방치될 수 있어 주의를 요한다고 합니다.


그 외에 특이한 방법 중 하나로, 맥주를 잔에 따르기 직전에 양 끝에 필터가 있고 안에 홉이 통째로 담겨 있는 원통형 장치에 맥주를 통과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도그피시 헤드Dogfish Head 양조사에서 개발한 방법으로, 이러한 장치를 랜달Randall이라고 부릅니다. 한 두 잔씩 먹을 때 쓰기에는 아까운 방법이지만, 시각적인 효과가 있다보니 맥주 축제에서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저도 2015년 <Great Korean Beer Festival : GKBF>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영국, 미국, 그리고 샌디에이고의 IPA


IPA가 영국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IPA라고 불리는 맥주는 대부분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리버티 에일Liberty ale에서 출발해 1980년대 미국 크래프트 브루어리의 급성장과 함께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스타일로, 옛날 영국에서 처음 개발된 IPA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영국식English IPA, 미국식American IPA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미국식 IPA는 영국식 IPA를 미국 사람들이 변형시킨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지만, 미국식 IPA가 훨씬 크게 유행해버리는 바람에 많은 분들이 IPA라고 하면 미국식 IPA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두 스타일의 가장 큰 차이는 홉의 품종에 있습니다. 영국에서 IPA를 처음 만들 때에는, 당연하지만, 영국에서 자라는 켄트 골딩Kent Goldings, 스티리안 골딩Styrian Goldings, 푸글Fuggles 등 품종의 홉을 사용했습니다. 영국, 에일, 그리고 IPA의 역사에서 소개된 영국식 페일 에일, 비터bitter에 비해 양만 많아졌을 뿐 비슷한 종류의 홉입니다. 대체로 비교적 점잖게 착 가라앉은 맛, 흙이나 풀을 연상시키는 땅의Earthy 맛이 난다고들 표현합니다.


반면, 미국식 IPA에서 주로 사용하는 미국 품종의 홉에는 3C로 불리는 케스케이드Cascade, 센테니얼Centennial, 콜럼버스Columbus 뿐만 아니라 치누크Chinook, 시트라Citra, 아마릴로Amarillo, 심코Simcoe, 모자이크Mosaic, 엘 도라도El Dorado 등이 있습니다. 딱 봐도 품종의 갯수가 영국보다 훨씬 많은데요, 미국에서는 수많은 크래프트 양조장이 저마다의 IPA를 만들려고 경쟁하다 보니, 새로운 맛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품종의 홉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식 홉에서는 훨씬 젊고 활발한 느낌의 시트러스함, 열대 과일을 연상시키는 달고 상큼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 부스, 맥파이 등으로 대표되는 국내 1세대 크래프트 양조장들이 경리단길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분들이 이 곳에서 파는 페일 에일에서 자몽 맛이 난다고 느꼈던 것은 바로 이 미국식 홉의 탓이 큽니다. 미국식 홉에서는 또한 울창한 숲 속을 연상시키는 송진resin 향도 종종 등장합니다.



또 하나의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맥아의 함량입니다. 보리가 하도 많이 들어가 세탁기 세제만큼 찐득한 보리죽으로 만든 버턴 에일 (관련글 : 영국, 에일, 그리고 IPA의 역사) 에서 유래한 영국식 IPA는 잘 볶은 카라멜 맥아를 적잖이 넣어 곡물의 고소하고 달큰한 맛이 중요한 요소로 들어가 있습니다. 강한 맛의 홉에 많이 묻히기 했지만, 그래도 영국식 IPA에는 홉으로 그린 그림 뒤에 맥아의 배경이 꼼꼼하게 칠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식 IPA는 홉 쥬스라고 불러도 될 만큼 홉의 맛이 독보적입니다. 어느 양조장의 새로운 IPA를 맛본다는 것이, 그 양조장에서 창조해 낸 새로운 홉의 조합을 맛본다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일 정도입니다. 물론, 미국식 IPA에도 여느 다른 스타일의 맥주 못지 않은 양의 보리가 들어갑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너무 강한 홉의 맛 때문에, 때로는 이것을 맥주보다는 홉주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러한 미국식 IPA 역시도, 워낙 다양한 상품이 쏟아지다보니 한 번쯤 더 분류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식 IPA 중에서도 영국식 IPA에 가까워 비교적 점잖은 맛이 나고 카라멜 맥아의 고소함과 밸런스를 갖춘 맥주가 있는가 하면,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상큼하고 짜릿한 홉의 맛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맥주가 있습니다. (번스타인 2015) 대체로 영국에 가까운 미국의 동쪽 해안가에서 전자를, 하와이에 가까운 서쪽 해안가에서 후자를 만들기 때문에 각각 동부East coast IPA와 서부West coast IPA로 부르는데, 특히 서부 IPA 중 많은 히트상품이 샌디에이고San Diego의 양조장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들을 두고 샌디에이고 스타일 IPA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임페리얼 IPA, 세션 IPA


새롭고 자극적인 맛의 맥주가 유행하다 보면 어떤 일이 생길지 너무나 자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더 세고, 더 쓰고, 더 자극적인 맛의 맥주를 만드는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나오겠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사람들은 IPA가 유행하자 두 배, 세 배로 홉을 많이 넣어 강렬하게 쓰고 알코올 도수 또한 높은 맥주를 만들어 냈습니다.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기억하시나요? 영국의 스타우트 맥주를 러시아 황실에 수출하는데, 러시아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도수를 크게 높인 수출용 맥주를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관련글 : 커피 대신 맥주로 스타벅스를 차려볼까)


그렇다면 복bock 맥주도 기억하시나요? 아인벡Einbeck 지방에서 유래해 복bock맥주라고 불리던 맥주가 알코올 도수가 높다보니 복bock이 맥주가 세다는 뜻이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관련글 : 이 독한 맥주도 누군가에게는 생명이었다)


두 사건을 종합해보면, 영어에서 황제, 황실을 뜻하는 임페리얼imperial이라는 단어가 맥주가 세다는 뜻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납득이 되실 겁니다.


Stone Brewing의 트리플 IPA (사진 : Stone brewing 공식 홈페이지)


이를 응용해 미국 사람들은 홉을 현저히 더 많이 넣어 매우 쓰고 세게 만든 IPA를, 실제로 황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임페리얼 IPA라고 불렀습니다. 임페리얼의 첫 알파벳을 따 줄인다면 IIPA가 되겠죠.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인디아 페일 에일IPA이 페일 에일PA보다 쓴 맥주였고, 임페리얼 인디아 페일 에일IIPA은 여기서 한 단계 더 써진 맥주인 것입니다. I의 갯수가 페일 에일의 센 정도를 나타나게 된 것이죠. 게다가, I과 II는 각각 로마 숫자로 1, 2를 나타냅니다. 자연스럽게 IIPA를 '더블-아이피에이', 줄여서 DIPA라고도 부르게 되었습니다.


역시 더블에 그칠 줄 모르는 인간들은 기어이 트리플 IPA를 만들어 냈습니다. 홉을 더, 더, 더 많이 넣은 극단적인 맥주입니다. 물론, 싱글, 더블, 트리플 IPA를 나누는 기준은 정해진 바가 전혀 없습니다. 어디부터가 더블, 트리플 IPA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홉을 무진장 넣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 쓰는 단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반대로, 일반적인 IPA보다 도수가 낮은 IPA도 있습니다. 홉에 중독되어 그 맛을 끊을 수가 없지만, 때론 주량이 부족해서, 때론 시원한 맥주를 많이 마시고 싶어서, 때론 운전을 해야 해서 (농담입니다. 아무리 도수가 낮은 IPA를 드셔도 운전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수 낮은 맥주가 필요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이런 IPA를 세션Session IPA라고 부르는데요, 이 역시도 보통의 IPA와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특히 일상생활을 해치지 않는 가벼운 음주 문화가 확산되면서, 굳이 세션이라는 표현을 붙이지 않아도 5~6도 이내의 약한 도수의 IPA가 많이 나오는 추세입니다.



홉으로 그린 작품들


IPA는 워낙 다양하고 잘 알려진 맥주 스타일이기 때문에 몇 가지 대표적인 맥주를 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영국, 동부, 그리고 서부 지역을 대표하는 IPA 몇 가지와 함께 글을 마치겠습니다.


영국식 & 동부 IPA

미국식 IPA가 대유행하는 시장 속에서, 영국식 IPA의 전통을 보전하려고 분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아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특이한 병에 담긴 Meantime IPA와, 런던의 대표적인 양조장 Fuller's에서 만드는 IPA 등의 영국식 IPA는 안타깝게도 국내에서 찾아보기는 조금 힘듭니다.



대신 한 가지 위안거리는 있습니다. 시카고에 있는 구스 아일랜드Goose Island 양조장은 최근 강남에 브루펍brewpub을 열었습니다. 시카고의 양조장으로부터 수입한 맥주 뿐만 아니라 이 브루펍의 자체 양조 시설에서 만든 맥주를 함께 파는 곳인데요, 전 세계에 다섯 곳 밖에 없는 구스 아일랜드 브루펍이 서울에 있다는 것은 참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구스 아일랜드는 미국 양조장이지만, 영국식 페일 에일, 비터bitter로 분류되는 홍커스 에일Honker's ale과, 그 연장선상에서 영국식에 가까운 동부 IPA를 만드는 곳입니다. 꼭 이 IPA를 위해서가 아니라도, 멋진 건물과 다양한 생맥주 라인업을 보유하고 있어 한 번쯤 방문해 볼 만한 곳입니다.


구스 아일랜드 브루펍 (사진 : 구스 아일랜드 공식 홈페이지)


국내 크래프트 양조장 중에서는 굿맨Goodman 브루어리에서 맥아와 홉이 안정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훌륭한 IPA를 만들고 있습니다.


서부 IPA

대답하기 힘들지만 종종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처럼요. 이런 FAQ:자주 묻는 질문에는 미리 대답을 정해놓는 것이 편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일 좋아하는 맥주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스컬핀Sculpin IPA라는 대답을 미리 정해놓았습니다.


샌디에이고의 밸러스트 포인트Ballast Point 양조장은 크래프트 맥주계의 최고의 히트상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양조장의 사장님이 낚시를 좋아해서 만드는 맥주마다 생선의 이름을 붙이고 라벨에 그림까지 넣는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합니다. (그러나 해당 사장님은 얼마 전 밸러스트 포인트를 떠났습니다) 스컬핀은 우리말로 둑중개라는 이름의 생소한 물고기인데요, 못 생긴건 아귀를 닮았지만 크기는 훨씬 작습니다.


스컬핀 IPA는 센테니얼, 아마릴로, 콜럼버스, 심코 홉 등을 넣어 만든 전형적인 서부 IPA입니다. 자몽, 살구 등을 연상시키는 상쾌한 맛과 진득한 송진의 맛이 합쳐져 매우 깊으면서도 밝은 쓴 맛을 냅니다. 최근에는 이 맥주에 천연 과일향을 첨가한 파인애플 스컬핀, 그레이프후르츠 스컬핀이 출시되기도 했으며, 밸러스트 포인트는 스컬핀 말고도 여러 종류의 IPA를 비롯한 맥주를 만드는 대표적인 미국의 크래프트 양조장입니다.


못생긴 물고기 스컬핀 (이미지 : 밸러스트 포인트 페이스북 페이지)


샌디에이고의 또 다른 히트 양조장으로 스톤Stone 브루잉을 꼽을 수 있습니다. 홉이라는 재료는 신선도가 중요해서, 홉이 많이 들어간 맥주는 유통기한 안쪽이더라도 가급적 빨리 먹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스톤 브루잉은 이 점을 부각시켜 제조한지 90일이 지난 IPA를 신고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맥주 이름에 권장 소비 기한을 넣어 'Enjoy by 날짜'라고 이름붙인 IPA를 만들기도 합니다.


파이어스톤 워커Firestone Walker 양조장에서는 유니언 잭Union Jack IPA를 만듭니다. 유니언 잭은 영국 국기의 이름이기 때문에 저는 당연히 영국식, 동부 IPA인 줄 알고 산 적이 있었는데, 맛이 이상해서 찾아보니 서부 IPA였던 기억이 납니다. 게다가, 이 곳은 상당히 훌륭한 영국식 페일 에일인 DBA: Double Barrel Ale을 만드는 곳이기 때문에 이는 소비자를 속이기 위한 계획적인 책동임에 분명합니다. 이에 고발합니다.


사실 IPA는 크래프트 맥주 중에서도 워낙 많이 개발되고 연구된 분야이기 때문에, 요즘은 어디에서 만들어도 크게 수준이 떨어지는 일이 잘 없는 스타일입니다. 때문에, 꼭 손꼽히는 유명한 작품일 필요 없이, 별다른 기대 없이 아무거나 집어 와도 실망할 위험성이 적습니다. 수입 크래프트 맥주보다 저렴한 국산 크래프트 맥주를 선택할 또 한 가지 좋은 이유가 되기도 하지요. 요즘 괜찮은 국산 크래프트 맥주는 어중간한 수입 맥주보다 훨씬 낫거든요.




한 달에 한 종류씩, '이 달의 모범맥주'와 함께 진하고 시원한 맥주 이야기를 배달합니다.

이 시리즈는 대한민국 공군 교양카페 <휴머니스트>에 <이 달의 모범맥주>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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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수제맥주? 맥주는 원래 수제였다.
10월: 옥토버페스트가 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10월: 뮌헨 맥주가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은 방법

11월: 모두가 겉으로만 아는 라거와 에일의 차이

11월: 영국, 에일, 그리고 IPA의 역사

12월: 이 독한 맥주도 누군가에게는 생명이었다

1월: 흔한 맥주라고 다 싸구려는 아니다

2월: 커피 대신 맥주로 스타벅스를 차려볼까

2월: 기네스의 질소충전포장: 맥주 거품의 과학

3월: 맥주가 너무 맛있어서 법에 구멍이 뚫렸다

4월: 세상의 모든 밀맥주

5월: 설탕으로 맥주를 덜 달게 하다


참고문헌
중앙일보 2017. 10. 21. http://news.joins.com/article/22034625
Brewer's Association, "History of Craft Brewing" https://www.brewersassociation.org/brewers-association/history/history-of-craft-brewing
E. Mosbaugh, "How the West Coast-Style IPA Conquered the World" (2015) https://firstwefeast.com/drink/2015/03/history-of-the-west-coast-ipa
B. Smith, "Best Hop Techniques for Homebrewing" (2008) http://beersmith.com/blog/2008/11/11/best-hop-techniques-for-homebrewing/
B. Stange, "4 Popular Methods of Dry-hopping Your Beer" (2015) https://learn.kegerator.com/dry-hopping/
D. Doucette, "Hopping Methods in All Stages of Brewing" (2016) https://www.homebrewsupply.com/learn/hopping-methods-in-all-stages-of-brewing.html
번스타인 (2015) "맥주의 모든 것" 푸른숲

커버 사진을 제공해 주신 바이헨슈테판 페이스북 페이지 @BallastPoint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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