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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18. 2024

감탄문과 의문문 사이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여섯 번째 -

“인생은 감탄문과 의문문 중간에 선 망설임이다. 의혹은 마침표에 의해 종식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는 문장의 끝에 느낌표와 물음표를 함께 쓰는 경우가 있다. “!?” 혹은 “?!”으로 문장을 마무리하곤 한다. 이건 뭐랄까? 내가 쓴 문장에 대한 나만의 확신과 느낌은 있지만 또한 독자가 나의 글을 읽었을 때 느낄 수 있는 불확실성과 의아함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는 것과 같다. 만약 느낌표가 앞에 있다면 확신이 더 큰 것이고 물음표가 앞에 있다면 의혹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건 물론 나만의 표현 방식이고 내가 스스로 정한 것이다.


이건 나의 글이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독자들이 읽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글은 전자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나는 글을 쓰지만 돈을 받고 쓰거나 누군가의 청탁이나 의뢰로 쓰는 글이 아니다. 나의 글은 얽매이지 않는다. 아니 얽매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쓴다. 그것도 아니다. 사실 나는 내가 뭘 쓰게 될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내 느낌에게 내가 무엇을 느낄 예정인지 한 번도 미리 암시해 준 적이 없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는 그저 그때그때 떠오른 나의 생각과 상상과 느낌이 머릿속에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남겨놓고 싶기 때문에 쓴다. 그래서일까 웃기지만 나는 과거 내가 쓴 글을 볼 때마다 새롭고 놀랍고 또 신기하다. 오래전에 썼던 글을 보면 ‘내가 썼던 글이 맞나’ 할 정도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내가 쓴 글을 내가 몰입해서 읽어내려간다. 그러면 그때의 기억과 느낌이 나를 다시 찾아온다. 읽을 때마다 그 기억과 느낌은 더욱 강렬해지며 더 많은 것들을 연상(聯想) 시킨다. 그래서 가끔 오래전에 썼던 글을 다시 보면서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거나 수정하기도 한다.


“독서란 나에게는 자신을 망각하는 일인데, 책을 읽고 있으면 내 이성이나 상상력이 논평을 다는 통에 책의 흐름이 자꾸만 방해받곤 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는 독서를 좋아하지만 사실 나는 독서에 집중을 잘하는 편이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마음은 되도록 빨리 많이 읽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 나는 비교적 느린 정독(만독) 법으로 읽는다. 그래서 독서량보다는 독서의 질에 더 집중하게 된다. 하나를 읽어도 오래 새겨두고 깊이 이해하려 한다.


내가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 행간에서 너무 와닿는 문장이나 표현법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그때마다 나는 밑줄을 치거나 나의 생각을 메모로 남긴다. 만약 그 문장이 강한 영감을 불러오면 당장 책을 덮고 글을 쓴다. 행간의 문장 하나가 던져준 상념이 5,000자(최소 A 지 4~5매 분량)의 가량의 에세이 혹은 칼럼으로 재 탄생되는 순간이다. 나의 글의 많은 경우가 이렇게 만들어진다. 간혹 그 영감이 또 다른 영감들을 불러일으켜 글이 1편, 2편으로 후속작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단편소설 수준의 분량이 나올 때도 있다. 이건 글이 글을 만들어내는 연쇄작용이자 연상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머리에 있는 생각이 출력되어 글로 보이면 그 생각들을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럼 다른 생각들이 따라온다. 그 때문에 감명 깊은 책 한 권을 다 읽으려면 이래저래 밑줄 긋기부터 메모에 글쓰기까지 병행되어 한 두 달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모든 책을 다 읽지는 않는다. 절반 혹은 1/3 정도만 읽고 다른 책으로 옮겨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중요한 건 한 권을 집었으면 되도록 거기서 얻은 생각을 최소 한 편의 글로 남기려고 한다.


최근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거의 매일 읽고 있다. 책의 분량도 적지 않을뿐더러 책 곳곳에서 만나는 의미심장한 문장과 표현법이 나의 눈길을 잡아 두고 자주 상념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렇게 벌써 페소아의 글과 관련된 에세이, 소설, 칼럼을 6편이나 썼다.


다시 만난 ‘불안’


얼마 전 한국에 갔다 돌아오기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알랭드 보통의 [불안 : 원제 Status Anxiety]을 기억한다.  다음 날 다시 찾은 그 책은 도서관 어디엔가 숨어 자취를 감추었다. 결국 [불안]을 읽지 못하고 떠나왔던 것이 계속 기억에 남았다. 그때 나의 심정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였기 때문일까? 사람은 불안하면 불안을 드려다 보고 싶어 진다. 감정을 파헤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불안]은 알랭드 보통이 아닌 페소아의 [불안]으로 내게 찾아왔다. 알랭드 보통의 [불안]은 우연이었고 페소아의 [불안]은 인연이었다. 페소아의 글을 계속 읽어 내려가면서 이 인연은 마치 운명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문장은 이해와 공감과 깨달음의 쓰리 콤보를 선사한다. 권투로 치면 ‘쨉’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더니 ‘훅’으로 공감을 날리고 이내 ‘어퍼컷’으로 깨달음으로 나를 녹다운시키는 놀라움을 선사하는 느낌이랄까!? 그의 책은 당당히 나의 인생 책 중 하나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그의 책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의 삶까지도 아주 신비롭고 또 흥미롭다.


그는 평생 자신의 그 신비로움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왜냐 그 신비로움을 받아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음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신비로움을 누군가에게 들켰더라면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로 격리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다수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 홀로 있는 자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영원히 이해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최고의 가독성 지닌 글은…


 세상에서 가장 잘 읽히는 글이 바로 자신이 쓴 글이다. 그건 그 누구보다 그 글을 가장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독자가 바로 작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독자가 자신의 글을 읽고 어떤 생각과 상상을 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작가는 혹여 자신과 같은 이해와 공감을 하는 독자 한 명쯤을 있길 바라기도 한다. 그럼 독자와 작가는 인연이 된다. 그런 인연이 많아진다는 것은 대중적인 작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또한 이 시대의 너와 내가 모두 공감하는 보편성으로 나아가고 있음이다. 내 글은 그런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글이 되고 싶진 않다. 나는 약간은 비대중적이고 때로는 비보편적이지만 그것이 오랜 시간 흐르고 난 뒤 대중성과 보편성을 가지게 되었으면 한다. 나는 페소아의 문장들이 그런 류의 글이 아닐까 생각된다.


대중성 있고 인기 있는 작가는 시대의 흐름을 다소(약간) 앞서간다. 또한 사실(寫實)과 추상의 적절한 접점을 찾아내 연결시키는 것을 잘한다. 독자는 현실과 가상을 오고 가면 리얼리티 속에서 이상적인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런 작가는 심리학자이기도 하다.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극본가(드라마 작가, 시나리오 작가등)들 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떻게 독자와 시청자들의 심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지를 가장 잘 아는 작가들이다. 그래서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그에 상응하는 부귀와 영광도 함께 누린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너무 앞 선 글은 대중에겐 생소하고 동떨어진 괴리감을 줄 뿐이다. 페소아의 글이 그러하다. 페소아의 [불안의 서]는 사실보다는 추상적인 표현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추상적이고 시적인 표현들이 사실(현상과 현실)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건 현실에게 대한 깊고 넓은 통찰이 없으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페소아의 글은 보편적이지 않다. 페소아는 고전 속에 담긴 지혜와 통찰 그리고 깨달음을 짧은 문장 속에 함축적이고 은유적으로 표현해 낸다.


의문문(?)과 감탄문(!) 사이


그의 문장들을 읽다 보면 항상 의문이 떠오르고 그 의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감탄이 터져 나온다. 그 사이엔 항상 망설임이 존재한다. 왜냐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페소아가 던져준 의혹과 의문 사이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생각들이 가져오는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도 그렇다고 기존의 것을 더 이상 견지할 수도 없는 불안감. 그건 아마도 현실의 익숙함과 마주한 또 다른 현실에 대한 궁금증 사이에서 생기는 불안일 것이다. 불안은 항상 우리를 망설이게 한다. 왜 그의 글이 [불안의 서]가 되었는지 이해가 된다.


페소아의 글은 철학으로 치면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적 사고방식(서평참고)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기존의 생각과 새로운 생각 사이에서 망설이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쉽게 변할 수 없다. 왜냐 현실에 묶여있는 많은 쇠사슬 때문에… 여태껏 지켜온 신념과 관념과 가치관을 포기할 수 없다.


이건 마치 예수가 세상에 나타나고 새로운 약속(신약)을 세상 사람들에게 던져 주었지만 세상 사람들이 여전히 옛날 약속(구약)에도 발을 걸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면 옛날의 계약은 폐기되는 것이 원칙이다. 약속이 동시에 두 개 일 수 없다. 어느 한쪽으로 넘어가야 하지만 우리는 어느 하나를 버리지 못한다. 그렇게 양쪽에 맞지 않은 모순을 모두 끌어안고 살아간다. 성경에 모순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신약과 구약 사이)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모순적인 것들과 모순적인 사람을 싫어한다. 자신이 모순적임을 알지 못한다. 이것 또한 모순이다. 그래서 나는 신이 모순의 세상에 인간을 가둬 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삶은 항상 의문과 감탄의 연속이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불안과 망설임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 이 불안(망설임)에서 해방된다. 누군가는 의문을 남기고 누군가는 감탄으로 생을 마감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의문문과 감탄문 사이에서 망설임(불안)을 쓰고 있다.


[불안의 서]


- 영상오디오 (릴스) -


https://www.instagram.com/reel/C24RO7URyaq/?igsh=d2JhNGx4a3ByMHF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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