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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신혼집 화곡동 시댁

살던 집 시리즈 열네 번째

by 조은미

남편과 서로를 알아갈 때 솔직했다. 내가 보낸 긴 나날들이 그의 앞에서 술술 열렸다. 부유했던 어린 시절과 나락으로 떨어졌던 고달프고 슬펐던 날들도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살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나와 많이 달랐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나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나는 묻고 또 물어서 그림 같은 몇 장면을 찾아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주일학교에 갔는데 아무도 없어 당황할 때 목사님이 나오셨다고 했다. 그리고는 남편을 작은 방으로 데려가시고는 따끈한 물에 가루우유를 한 잔 타서 주셨다고 했다. 그 따스한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조촐한 목사님 방에서 후후 입김을 불며 우유를 홀짝였을 초등생 남편의 모습을 상상했다.


삼남일녀 중 막내인 남편은 형들과 나이 차이가 있어서 다투며 크지 않았다고 하고, 형들에게는 엄격하셨던 시아버님도 남편에게는 매를 드신 적이 없다고 했다. 남편은 개구쟁이도 장난꾸러기도 아니었고 그냥 심심하게 자란 것 같다. 시아버님은 초등학교에서 오래도록 교직에 계시다가 교장선생님이 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위암이 재발되어 돌아가셨다. 함께했던 모임의 청년들과 병문안드린 기억이 난다. 낮은 음성으로 "와주어서 다들 고맙다." 하셨다. 반면 아버님이 떠나신 후에도 어머님의 기도 소리는 쩌렁쩌렁하셨고, 집안의 어른으로서 꿋꿋하셨다. 아들 셋과 그들의 식솔까지 모두 거느리고 한 집에서 사는 것을 꿈꾸셨는데, 큰 형님 내외와 손주들 그리고 막내아들 내외까지만 함께 하시다가 아버님 곁에 묻히셨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옆집과 함께 쓰는 벽돌담이 있었다. 그 사이 좁은 길로 걸어가야 시댁의 현관이 나왔다. 현관을 지나쳐 몇 걸음을 더 가면 아담한 마당이 나왔고 앞집의 뒷담에 닿을 때까지 이어졌다. 화단 가에는 감나무 몇 그루와 라일락 나무가, 반대편 구석에는 시멘트로 올린 장독대와 그 아래 작은 창고가 있었는데, 거실의 큼직한 창으로 이 마당이 모두 보였다. 늦가을, 감이 충분히 익으면 식구 중 누군가 긴 고리 달린 장대로 감을 땄다. 나는 시어머님께 인사를 드릴 때 처음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벽과 마루 모두 나무로 되어있지만 햇살이 좋아 어둡지 않았다. 시어머님도 환하게 나를 맞아주셨다. 그러나 거실과 안방 쪽을 남향으로 맞추기 위해 지은 이 집의 구조가 나에게는 이상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마당을 지나 다시 현관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던 어린 시절의 집들과 달라서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화단의 잔디가 사라지고 부추밭으로 변해서 깜짝 놀랐다고 남편은 말했지만, 내 생각에는 하루아침에 화단의 내용물이 바뀌었을 리 없고, 남편이 학교 갔을 때, 잡풀이 섞인 지저분한 잔디를 바라보던 어머님이 "이 참에 부추 씨를 뿌려보자!" 하고 '화단'을 '밭'으로 일구신 듯싶다. 눈썰미 없는 남편에게 보였던 신기한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닌 우리 어머님의 수고였음이 분명하다.


우리의 신혼방은 기존의 시댁의 외벽을 터서 방을 들이는 공사로 급조되었다. 안채 현관문으로 가기 전, 대문 가까이에 작은 출입문을 뚫고, 왼편에 화장실과 세탁실을, 오른편으로 방을 들였다. 그리고 좁은 툇마루 끝에 불투명 유리가 끼워진 격자 미닫이 문을 달았다. 방에는 햇살이 들어오는 높은 창이 있었고, 그 옆의 벽과 바깥 담 사이로 좁고 길쭉한 부엌을 만들었다. 내가 결혼하면서 준비한 살림이라고는 소형 냉장고와 장롱, 화장대가 전부였는데 남편이 쓰던 책상까지 한 자리 잡고 보니 방이 꽉 차 버렸다. 사랑싸움을 해도 숨을 곳이 없는 단출한 공간에서 남편은 "이 화곡동 집은 나를 포함 형님 둘과 함께 세 사람 명의로 되어있어."라고 종종 말했고 내게 그 말은 언젠가 진짜 우리 집이 꼭 나타날 거라는 주문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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