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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드리머 Jun 27. 2024

일 년 살기 왔다가, 계속 살기로 했다

지금의 일상이 좋아서


"난 공부를 잘 못해서 속상해."


 한국에서 2호는 크게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특별히 못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난 공부를 잘 못해서 속상해."라고 말했다. 어디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봐도, 본인은 잘하는 게 없다고만 대답했다. 아이가 생각하는 '잘'의 기준이 너무 높은 건 아닐까 싶었다. "너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라고 여러 번 말해줬지만, 아이의 표정은 쉽게 수긍하지 않는 듯 보였다. 2호는 학교를 지루해했고, 하교 후 전화 통화 때마다 목소리가 힘없이 축 처져 있었다. 학교 생활이 전혀 즐겁지 않은 듯했다. 한국의 공교육이 아닌 다른 환경에 가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제주 IB 학교를 고민하기도 했다. 결국 치앙마이로 오게 되었지만.


"엄마! 나 머리가 좋은 것 같아."


 치앙마이에 온 지 3개월 뒤, 아이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왜 갑자기 그렇게 생각해?" 물어보니, "그냥 느껴졌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의 긍정적인 변화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아마도 영어로 친구를 사귀고,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 그 이유를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친구들이 전부 학원을 다니면서 숙제도 엄청 많이 했는데, 나는 안 했잖아. 그래서 괜히 마음이 쪼그라들었어. 나만 공부 안 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여기서는 다들 학교만 다니니까 그중에서 내가 잘하는 것 같아."


 학원을 다니지 않음으로 인해 아이가 위축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학원을 다니는 것도 싫고, 공부하는 것도 싫으면서, 뒤처진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나 보다. "공부를 많이 한다고 다 잘하는 건 아니야."라고 하자, 2호는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잘할 가능성이 높잖아."라고 대답했다. 그 말도 맞다. 아이의 말을 듣고 나니, 치앙마이에 오지 않고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에 아찔해졌다.




세컨더리에 오길 잘했다 


  아이들의 10대에 국영수 문제집을 푸는 것보다 다양한 언어를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아마 이상적인 생각일 거야.’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치앙마이에 와보니, 내가 원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집에서는 한국어, 학교에서는 영어와 태국어(주 2시간), 그리고 세컨더리부터는 프랑스어(주 4시간)를 배우고 있다. 하교 후에는 작년에 시작했던 독일어를 조금씩 공부하고, 최근에는 일본어까지 관심을 가지며 학습 중이다. 총 6개의 언어를 접하는 셈이다. 이 모든 것을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국제학교 덕분이다. 학교에서는 영국인 선생님이 프랑스어를, 독일인 선생님이 영어를, 한국인 선생님이 중국어를, 스페인 선생님이 음악을, 중국인 선생님이 미술을 가르친다. 더불어 혼혈친구들은 자연스럽게 2~3개 국어를 구사한다. 1호는 언어에 대한 벽이 전혀 없고,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풍부한 언어 자극을 받으며 자라고 있어 매우 만족스럽다.


 보통 한국 아이들이 해외에 나오면 수학을 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4월 말쯤, 1호의 수학 선생님이 아이에게 math competition에 나가보라고 제안하셨다. 며칠 뒤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12명의 아이들만 참가한 시험이었다. 아이는 Year 8에서 배우지 않은 수학 용어들은 몰라서 몇 문제는 풀 수 없었다. 며칠 뒤, 시험 점수가 아침 조회 시간에 공개된다는 말을 듣고는, 시험을 보지 말 걸 그랬다며 걱정했다. "온 지 1년도 안 됐고, 처음 보는 시험인데 꼴찌 하면 어때? 시험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한 거야."라고 말해줬다. 그런데 몇 주 뒤, gold certificate 상장을 받아왔고, 학교에서 3등을 했다. 알고 보니 학교 자체 시험이 아닌, 영국수학경시대회(UKMT)였던 것이다. 조회 시간에 친구들과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상장을 받고 박수를 받았던 경험이 아이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다. 이후로 아이는 스스로 '수학을 잘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UKMT는 세컨더리인 Y7 이상이 치르는 시험으로, 전체 응시자의 상위 40%에게 gold, silver, bronze 상장을 1:2:3의 비율로 수여한다. 한국에서는 수학 경시대회를 개인적으로 준비하고 주말에 시험 장소로 가서 시험을 보는 반면, 여기서는 학교에서 시험을 보고 상까지 챙겨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친구들이 수학 문제를 모를 때 1호에게 물어보는 일이 늘어나면서 아이는 더욱 즐거워했다. 친구들과 선생님의 인정, 그리고 영국이 주관하는 end of year 시험(영어, 수학, 과학)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은 경험이 자기 확신과 긍정적인 공부 정서를 더해 주었다. 프라이머리가 아닌 세컨더리에서 온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Photo by René Porter on Unsplash




우리 부부의 변화 


 "운동 많이 하시나 봐요. 몸이 좋으신데요."
 남편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자주 듣는 말이다. 외국에서 아는 사람 없이 살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한정적이다. 사람들을 만나 술을 즐기는 남편이었지만, 여기서는 그런 기회가 많지 않다. 대신 남편은 저녁마다 헬스장에 가고 수영을 하는 운동 루틴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몸이 자연스럽게 좋아졌고, 운동에 대한 칭찬을 받으면서 운동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몇 달 전부터는 테니스도 시작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골프를 하지만, 액티브한 테니스가 더 멋있다고 부추겼다. 이제는 유튜브로 테니스와 수영을 즐겨보는 남편을 보면 새삼스럽다. 철인 3종 경기를 하는 (우리) 오빠를 보면서, 늘 운동에 빠져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남편은 자신이 그렇게 운동에 몰두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몸을 챙기는 것 같지만, 여전히 매일 맥주를 마신다. "맥주는 술이 아니야"라는 게 남편의 논리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며 성장하는 동안 우리도 뭔가 성장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남편과 이야기한 적이 있다. 돌아보니, 남편에게는 운동, 나에게는 브런치가 그 답이었던 것 같다. 나 역시 아이들처럼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도전한 것이 바로 '브런치'다. 작년에 브런치 작가로 신청해 합격했지만, 생각보다 글을 쓰는 게 쉽지 않았다. 강제성이 없으니 자꾸 미루게 되었고, 올해 5월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치앙마이에서 살고 있는 이 시간을 기억 속에서 휘발되지 않게 붙잡아두고 싶었다. 처음에는 누군가 내 글을 읽을 거라는 기대 없이 글을 남겼는데, 조회수와 라이킷을 볼 때마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공감해 준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큰 힘이 되었다. 이 감사함과 기쁨이 내게 더 큰 동기부여가 되었고, 앞으로도 꾸준히 글을 쓰고 싶어 진다.


Photoby sydney Rae on Unsplash




여기 계속 있을까? 한국 갈까? 


 두 아이 모두 하교할 때의 표정과 목소리 톤이 확연히 달라진 것이 눈에 띈다. 조용하고 감정 표현이 많지 않았던 1호는 전보다 수다스러워졌고, 사춘기 나이에 접어들면서 엄마와 거리를 두기보다는 오히려 더 가까워지고 있다. 가끔 산책할 때는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걸으며 학교 이야기를 쫑알거린다. 확실히 웃음도 더 많아졌다. 어릴 때는 늘 혼자 앞서 걷던 아이였는데, 스킨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아이가 더 많은 스킨십을 하며 다가오는 변화가 고맙기만 하다. 


 2호는 수학 문제집이나 독서를 시켜도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문법이 부족한 것 같다며 스스로 유튜브 강의를 보며 문제집을 풀기도 했다. 원래 감정 표현이 많았던 2호는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생각이 점점 풍부해지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런 아이들의 변화가, 계속 치앙마이에 머물고 싶게 만든다.

 

 유튜브와 커뮤니티의 수많은 정보를 보면, 한국의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학원을 다니든 다니지 않든 '해야 할' 공부 자체는 해가 갈수록 어마어마하게 늘어나고 있다. 중학교에 입학한 조카는 중간고사가 3과목인데도 한 달 전부터 시험공부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기말고사 준비로 새벽 1시에 자고 있다고 한다. 1호와 고작 한 살 차이인데도 이렇게 다르다. 


 1호도 여기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지만 공부는 1시간 정도가 전부다. 처음에는 너무 적게 공부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결과는 좋았다. 여기서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 한국에서는 중학생도 공부 부담이 큰데 고등학생이 되면 내신과 수행평가, 수능까지 해야 하니 얼마나 고될까 싶다. 아이들에게 그런 무게를 지우고 싶지 않아 한국으로 가는 걸 피하고 싶다.


 아이들은 어디에 살아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한국으로 가면 지금 아이들이 누리는 자유시간이 사라지거나 확연히 줄어들게 뻔하다. 아이들의 유년기를 독서와 운동, 그리고 가능하다면 여행으로 채워주고 싶다. 


지금 치앙마이에서 보내는 일상이 좋아서, 우리 가족은 이곳에서 당분간은 계속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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