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살기 왔다가, 계속 살기로 했다
지금의 일상이 좋아서
"난 공부를 잘 못해서 속상해."
한국에서 특출 나게 눈에 띌 만큼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을 뿐 딱히 뭔가를 못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2호는 종종 말했다. 어딜 봐서 네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물어도 본인은 잘하는 게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아이가 생각하는 '잘'의 기준이 너무 높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너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여러 번 말해줬지만, 아이의 표정을 보면 수긍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는 늘 학교가 지루하다고 싫어했고, 하교하면서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아이의 목소리는 늘 기운 없이 축 쳐져 있었다. 아이의 학교생활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그때 생각했다. 제주 IB학교를. 현재의 공교육과 다른 학교로 가보면 좀 나아질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치앙마이에 오게 됐다.
"엄마! 나 머리가 좋은 것 같아."
치앙마이에 온 지 3개월 뒤였다. 갑자기? 왜? 그냥 느껴진단다. 아이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긍정적으로 변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아마 오기 전에 영어로 친구 사귀는 것과 학교 수업을 듣는 것에 대해 걱정했는데, 쉽게 해내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게 아닐까 추측했다. 그런데 최근에 아이에게 그 이유를 들었다.
"한국에서는 친구들이 전부 학원을 다니면서 숙제하느라 공부를 엄청 많이 하는데, 나는 안 했잖아. 그래서 그때는 괜히 마음이 쪼그라들었어. 나만 공부 안 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여기는 다들 학교만 다니니까 그중에서 내가 잘하는 것 같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학원을 다니지 않음으로 인해 아이가 위축되었었다는 사실을. 학원을 다니기도, 공부를 하기도 싫은데 그로 인해 자신이 뒤처지는 듯한 느낌을 아이는 받았었나 보다. "공부를 많이 한다고 다 잘하는 건 아니야." 했더니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잘할 가능성이 높잖아." 한다. 그건 맞다. 아이의 말을 듣고 치앙마이에 오지 않고 계속 한국에 살았으면 어쩔 뻔했나 아찔했다.
세컨더리에 오길 잘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의 10대에 국영수 문제집 풀기보다 언어를 다양하게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늘 이야기하곤 했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아마 이상적인 생각이겠지?'라는 말을 덧붙였다. 치앙마이에 와서 집에서는 한국어를, 학교에서는 영어와 태국어(2시간/주)를, 세컨더리부터 시작하는 프랑스어(4시간/주)를 하는 환경이다. 하교 후에는 작년에 시작했던 독일어를 개인적으로 조금 하고, 최근에는 아이가 관심 갖기 시작한 일본어를 하고 있으니 총 6개의 언어를 접하고 있다. 내가 바라던 대로 된 셈이다. 이를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지금의 국제학교 덕분이다. 영국인 선생님이 프랑스어를, 독일인 선생님이 영어를, 한국인 선생님이 중국어를, 스페인 선생님이 영어로 음악을, 중국인 선생님이 영어로 미술을 가르친다. 더불어 2~3개 국어를 하는 혼혈 친구들이 있다. 1호는 나를 포함한 성인이 생각하는 언어에 대한 벽이 없다. 내가 원했던 것 이상으로 풍부한 언어 자극을 받고 있어 이 부분이 정말 만족스럽다.
보통 한국의 아이들이 해외에 나오면 수학을 잘한다는 말이 있다. 4월 말쯤이었을까? 수학선생님이 1호에게 math competition을 나가보라고 하셨다. 며칠 뒤에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12명의 아이들만 시험을 봤고, 아이는 Year8에 배우지 않았던 수학용어는 몰라서 찍었다고 했다. 나중에 시험 점수가 아침 조회 시간에 공개가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는 놀라며, 시험을 보지 말걸 그랬다고 걱정을 했다. 온 지 1년도 안되었고 처음 보는 시험이니 꼴찌 하면 어떠냐고, 시험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한 거라고 말해줬다. 몇 주 뒤에 아이는 'gold certificate' 상장을 받아왔고 학교에서 3등을 했다. 알고 보니 학교자체에서 본시험이 아니라 영국수학경시대회인 UKMT 시험을 봤던 거였다. 친구들과 선생님이 모두 보는 앞에서 조회시간에 앞으로 나가 상장을 받으며 박수받은 경험을 계기로 아이 스스로 '수학을 잘한다'는 확신이 강해졌다.
UKMT는 세컨더리인 Y7이상부터 보는 시험으로, 시험본 전체 아이들의 40% 중에서 1:2:3의 비율로 gold, silver, bronze상을 준다. 한국의 수학경시는 개인적으로 공부하고 신청하고 주말에 시험장소로 찾아가서 시험을 보는데, 여기서는 학교 자체에서 시험을 보고 상까지 챙겨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친구들이 모르는 수학문제가 있으면 아이에게 와서 물어보는 상황이 늘수록 아이는 즐거워 보인다. 친구들과 선생님의 인정을 받고, 영국에서 주관하는 end of year 시험(영어, 수학, 과학만)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아 자기 확신, 긍정적인 공부정서가 더해졌다. 프라이머리가 아닌 세컨더리에 왔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Photo by René Porter on Unsplash우리 부부의 변화
"운동 많이 하시나 봐요. 몸이 좋으신데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남편이 자주 듣는 말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국에서 살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한정적이다. 저녁에 종종 사람들을 만나 술을 즐기는 남편이지만 여기서는 불가능하다. 대신에 저녁마다 헬스장을 가고 수영을 하는 루틴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이 좋아진다는 칭찬을 듣고, 운동에 관심이 생겨 몇 달 전부터는 테니스를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골프를 하지만 액티브한 테니스가 더 멋있다 보인다고 옆에서 부추겼다. 이제는 유튜브로 테니스와 수영을 즐겨볼 만큼 운동에 몰두하고 있는 남편이 새삼스럽다. 전에 철인 3종 경기를 하는 (나의 친) 오빠가 늘 운동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며 특이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그렇게 운동에 빠져들 줄은 몰랐다고 스스로도 놀란다. 몸을 많이 생각하는 듯하지만 술은 매일 마신다. 맥주는 술이 아니라나.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며 성장하는 동안 우리도 뭔가 성장을 조금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남편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지나고 보니 남편에게는 운동이, 나에게는 지금하고 있는 브런치가 아닐까 싶다. 아이들처럼 나도 새로운 것을 시작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도전한 것이 바로 '브런치'였다. 작년에 브런치에 작가신청을 해서 합격했지만 생각보다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강제성을 두지 않으면 미루게 되는 것 같아 올해 5월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치앙마이에서 살고 있는 지금의 이 시간들이 기억에서 휘발되지 않도록 붙잡아두고 싶었다. 누군가 내 글을 읽을 거라는 기대 없이 무언가 남기고 싶어 글을 썼는데 조회수와 라이킷을 볼 때마다 누군가 소중한 시간을 내어 내 글을 읽어준다는 감사함, 내 글에 공감해 준다는 기쁨이 생각보다 큰 힘이 된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글을 쓰고 싶어 진다.
Photoby sydney Rae on Unsplash여기 계속 있을까? 한국 갈까?
두 아이 모두 하교할 때 표정과 목소리톤이 확연히 달라졌음이 눈에 띈다. 조용하고 감정표현이 많지 않았던 1호는 전보다 수다스러워졌고, 사춘기 나이에 접어들면서 엄마와 거리를 두기보다 오히려 더 가까워지고 있다. 가끔씩 산책할 때마다 안 하던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걸으며 학교 이야기를 쫑알거린다. 어릴 때부터 걸을 때는 혼자 앞서 걷던 아이였다. 스킨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키웠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다. 내게 더 많은 스킨십을 요구하는 아이가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그런 아이의 변화가 너무 고맙다. 확실히 웃음도 많아졌다. 수학문제집이나 독서를 시켜도 본인이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던 2호는 언젠가 문법이 부족한 것 같다며 스스로 혼공선생님의 유튜브 강의를 들으면서 문제집을 푸는 놀라운 모습도 보여줬다. 원래도 감정표현이 많은 아이였는데 전과 다른 환경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아이의 생각이 점점 풍성해지는 것이 보인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이 계속 치앙마이에 머물고 싶게 만든다.
유튜브와 커뮤니티의 수많은 정보를 보면 한국의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학원을 다니든 다니지 않든 '해야 할' 공부 자체는 해가 갈수록 어마어마하게 늘어날게 뻔하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군지로 이사 간 조카는 지난 중간고사가 3과목인데도 한 달 전부터 시험공부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기말고사 준비가 한창이라 새벽 1시에 잔다고 한다. 1호와 고작 한 살 차이다. 1호도 여기서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보지만 공부는 1~2시간 하는 게 전부다. 처음엔 너무 공부를 조금 하는 게 아닌가, 아이가 공부 방법을 몰라서 저러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결과는 좋았다. 여기선 이 정도만 공부해도 충분히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다. 조카를 보면 중학생도 이 정도인데, 고등학생이 되어 내신과 수행, 수능까지 하려면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아야 할지 뻔하기에 한국으로 가는 걸 피하고 싶어 진다.
아이들은 어디에 살아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한국으로 가면 지금 아이들이 누리는 자유시간이 사라지거나 확연히 줄어들게 뻔하다. 나는 아이들의 유년기를 독서와 운동, 가능하면 여행으로 채워주고 싶은 욕심 많은 엄마다. 이곳에서 보내는 지금의 일상이 좋아서 우리 가족은 치앙마이에서 계속 살기로 했다.
오늘은
<4인가족, 치앙마이에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 연재글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앞으로
'일 년에 한 번씩, 5개국 한 달 살기'(제목 미확정) 연재글로 다시 찾아뵐게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