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과 우리나라의 차이점 중에 확연히 다른 걸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스쿠터’ 문화이다. 10년 전, 대만을 처음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도로를 꽉 메운 수많은 스쿠터였다. 신호가 바뀔 때마다 각양각색의 스쿠터가 도로를 질주했다. 주차장에서도 자동차보다 스쿠터 전용 주차 공간이 넉넉했다.
지난번의 여러 스쿠터의 모습을 추억하며, 이번 대만 여행은 색다르게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들었다. 직접 대만의 문화를 체험해 보거나 보다 다양한 경험을 남기고 싶었다. 실제로 대만 여행에 대해 검색하면 스쿠터를 탄 사람들의 모습이 여러모로 많이 비친다. 심지어 <나 혼자 산다>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대만의 스쿠터가 나와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애달픈 사랑의 서사를 그린 드라마 <상견니>에서와 같이, 이 프로그램에서도 출연진들이 스쿠터를 타고 도심을 누비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나는 구름 없이 새파란 하늘 아래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스쿠터를 타고 시원하게 달리고 싶었다. 스쿠터는 그야말로 로망 그 자체였다.
“우리 꼭 스쿠터를 타보자!”
안전할 지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설렘이 더 컸었기에 어서 실행에 옮기고 싶었다. 친구와의 논의 끝에 컨딩(墾丁) 지역보다는 타이중 지역에서 타는 게 안전하다는 결론을 지었다. 타이중은 내륙에 위치해서 비록 바닷가의 풍경은 마음속에 접어야 하겠지만, 도심 사이를 힘차게 달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타이중에 도착하면서 곧장 스쿠터 대여소로 갔다. 거리의 모퉁이를 돌자마자 대여소 여러 개 들이 즐비해 있었다. 간판에 하루 300달러,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다. 어차피 우리는 스쿠터 한 대에 우리 둘이 함께 탈 예정이라, 절반의 가격으로도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여권과 한국 운전면허증을 내밀었다. 받아 든 사장이 이것저것 살피는 동안, 나는 수많은 스쿠터를 훑어보며 어떤 걸 타야 할지 속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에 띄는 스쿠터 하나를 골랐다. 그런데 우리의 신분증을 살펴본 사장이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Sorry.”
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다시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는 당황해하면서 휴대전화로 번역기 어플을 켜서 무어라 쓰고 있었다. 그러더니 휴대전화를 우리에게 보였다. ‘국제 운전면허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한국 운전면허증 만으로도 충분히 탈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난색을 표하는 표정뿐이었다. 다른 대여소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만 같아, 괜히 <나 혼자 산다>를 원망했다. 대체 그 프로그램에서는 왜 국제 운전면허증이 필요하다고 소개하지 않았던 건가! 나는 중얼거리면서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국제 운전면허증을 꼭 따리라 다짐했다. 그나저나 이것 때문에 대만 여행에 차질이 생겨버리자, 우리는 매우 곤란해졌다. 대중교통으로만 여행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태껏 계획해 둔 모든 일정을 하는 수 없이 조정해야 했다. 그렇지만 오히려 이럴 때만이라도 여유롭게 살아봐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무엇이든지 틀려도 괜찮고, 그저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걸 깨닫고 싶어졌다. 이 순간만큼은 스쿠터 대신 버스 여행을 하는 지금, 계획의 틈이 생기게 한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는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는 수 없이 버스를 잡아 타야만 했다. 다음 목적지까지 스쿠터로는 20분이면 달릴 거리를, 버스로는 40분이나 넘어야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상견니>는 무슨! 우리는 시무룩해진 채로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여러 사람이 스쳤고 중국어로 채워진 간판과 낯선 건물들을 지나갔다. 힘이 들 때면 그늘 속의 벤치에 앉아 잠시 쉬기도 했다. 뜻하지 않은 여유 시간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시간 낭비라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스쿠터를 빌렸으면 만끽하지 못했을 풍경들을 제대로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바람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소소한 부분들까지 눈에 담을 수 있어 감사한 마음까지 솟아났다.
인생이 어찌 계획대로 흘러가겠는가.
나는 당연하면서도 잊고 있었던 진리를 떠올렸다.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고생을 하는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 싶어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계획과 일정을 따르는 안정감은 달콤할 수 있다. 생생한 삶의 경험을 이를 통해 채우기는 힘들다. 만약 <상견니>처럼 과거로 돌아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나는 안정감과 모험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나는 안정감을 선택하겠지만, 도전하는 마음 역시도 잊지 않고 싶다. 세계를 넓혀나가고 싶은 호기심은 안정감을 뛰어넘을 만한 흥미로움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먼 훗날, 안정감 때문에 한 곳에 가만히 맴돌고만 있는 나를 탓하지 않으려면 이런 여행 또한 사랑해야겠다.
여행은 결국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