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앵두 탐방기 2
청주로 가기 위해 정말 오랜만에 상행선 버스를 탔다. 올해 3월에 전주에 내려왔으니, 8개월 만에 상행선 버스를 타는 셈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늘 타던 상행선 버스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특별한 경우에나 탈 수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청주는 지금껏 두 번 갔었다. 한 번은 목포에서 고성까지 도보여행을 하는 중에 지나간 곳이었고, 그 여행으로 진천에서 고추를 심게 되는 체험을 해보면서 그 다음 해에도 고추를 심기 위해 청주터미널에 갔었다. 이처럼 스쳐가던 도시에서 오늘은 찾아가는 도시로 변모한 셈이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청주로 향하는 버스는 터미널로 들어가기 전에 청주의 두 곳에서 정차를 했다. 한번은 청주남부터미널이라는 간이터미널에서 정차를 했고 또 한 번은 충북대병원 앞에서 정차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앵두가 충북대병원 앞에서 내려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훨씬 멀어진다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에 톨게이트를 빠져나왔을 때부터 잔뜩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충북대병원에 서자마자 바로 하차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아무도 없다. 아니, 앵두가 없다. 마치 시베리아 한 복판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것처럼 ‘이 상황은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락을 해보니 좀 사정이 생겨서 이제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첫 만남부터 엇갈렸지만 기분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겨울이 다가오기 전의 마지막 가을이자, 날씨도 여행하기에 너무도 완벽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날에는 엇갈려도, 또는 약속이 펑크난다 해도 모든 게 용서되는 마법의 날이다. 뭘 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행복한 날이다.
단재학교에 있을 때 아이들과 정말 많은 곳을 다녔다. 지리산을 종주해보기도 했고, 자전거를 타고 대구에서 서울까지 달리기도 했으며, 전주와 부산영화제는 수시로 찾아다녔고, 안동에선 신선놀음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여행이든 계획대로 되기보다 계획은 깨져 그 상황에 맞춰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가며 여행을 하게 되더라.
이번 주 화요일엔 단재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건호가 전주에 찾아와서 함께 하룻밤을 보냈는데 그때 재밌는 얘기를 해줬다. 간혹 과거에 학교 다닐 때를 떠올리곤 하는데 생각나는 장면들이 있다는 것이다. 17회 부산영화제에 왔을 때 표를 구하지 못해 새벽부터 나와 표를 얻기 위해 함께 기다리던 일, 부활의 김태원을 만나기 위해 위대한 콘서트에 왔다가 결국 만나지 못하고 갔던 일 등을 얘기했다. 재밌는 점은 그 일들은 그 당시엔 계획했던 것을 이루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기분 나빴던 것이고, 사서 고생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에 와선 오히려 계획에서 틀어졌기에, 상황이 엇나갔기에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런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앵두가 없던 정류장에 내린 그 순간에 오히려 더 마구 가슴이 뛰었던 것일 테다. 엇나감, 하지만 그래서 기억에 또렷이 남는 환희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앵두를 만났을 땐 ‘손님 대우 이렇게 하느냐’고 너스레를 떨고 싫은 소리를 하긴 했지 말이다^^;;
충북대병원 앞 신호에서 만나 자연스럽게 발길을 옮겼다. 앵두는 요즘 생활이 편안한지, 아니면 자신이 꿈꾸던 일들이 하나 둘 이루어지기 때문인지 얼굴이 활짝 폈더라. 생기가 가득 넘쳐 보였고 자신감도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아 보였다.
어쨌든 점심시간이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앵두도 지나가며 이곳을 자주 봤었는데 늘 사람들이 많아 혼자 들어가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말하더라. 그래도 아직 시간은 11시 30분으로 점심으론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홀 안은 한산했다. 우리는 가장 기본인 해장국을 시키고 한참이나 최근이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해장국은 맑은 국물에 선지와 양과 콩나물, 파 등이 담겨 나왔다. 옆에 다대기가 놓여 있으니 입맛에 따라 얼큰하게 먹어도 된다. 올 초에 제주도를 여행할 때에도 두 번의 해장국을 먹었었는데 서귀포에서 먹은 해장국은 매우 자극적인 국물(물론 매운맛을 시켰기는 하다)에 반찬들까지도 매운 것 투성이라 제대로 먹을 수 없었지만, 표선면에서 먹은 해장국은 맑은 국물에 마늘향까지 짙게 배어 있어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을 수 있었다. 그처럼 이곳의 해장국도 자극적이지 않고 매우 순한 맛이었기에 국물도 조금씩 먹어가며 내용물을 한 입씩 먹을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너무 자극적인 음식을 많이 먹다 보니 이런 식의 담백한 음식들이 그리워지던 차였는데, 정말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앵두가 늘 인산인해라고 했던 말마따나 한참을 먹고 있다고 둘러보니, 사람들이 자리마다 한 가득 찼더라. 이런 곳이 바로 로컬맛집인 거겠지.
거기서 10분 정도를 걸어가니 마침내 ‘THE 앵두’가 나왔다. 가는 길엔 처음으로 공간에 가는 것이니만큼 구색은 갖추고 싶었다. 나야 공간을 열어본 적이 없으니 공간을 열 때까지의 우여곡절은 잘 모르지만, 몇 번 이사한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볼 때 그 또한 만만치 않은 일임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흔히 집들이를 할 때 고생했다는 의미로, 이 공간에서 맘껏 나래를 펼치란 의미로 집들이 물품을 사오듯 그러고 싶었다. 생각 같아선 꽃집에서 꽃도 사고 필요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사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근처엔 꽃집이 없더라. 그래서 뭘 필요하냐고 물어보니, “현금이면 좋죠~”라고 농을 치더라. 그러면서 “커피면 될 거 같아요”라고 말해줘서, 근처 마트에서 커피와 코코아를 사왔다.
이제 드디어 공간으로 들어가 볼 차례다. 처음 공간을 마침내 마련했다고 했을 땐 오래된 건물에 리모델링을 해서 들어온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직접 가서 보니 새 건물 1층에 공간이 들어서 있더라.
그때 매우 낯설면서도 여러 상상을 자극하는 단어를 기어코 보고야 말았다. 그건 바로 바로 ‘성인영어’라는 단어다. 그렇지 않아도 밥을 먹으며 “도대체 그 공간에선 뭘 하는 거예요?”라고 물어보긴 했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듣다가, ‘성인영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것이다. 물론 그 말은 중고생들을 위한 입시영어가 아닌, 성인들의 일상회화,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한 영어를 가르친다는 말이었는데, 그 단어의 조합이 매우 독특해서 한참이나 웃긴 했다. 보통 ‘성인’이란 단어를 어두에 붙일 땐 ‘19금’과 같은 좀 외설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5월에 만나 ‘공간을 열어볼까 생각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과연 그 공간은 어떻게 꾸밀 것이며, 어떤 내용들이 담길까?’ 궁금하긴 했었는데, 이렇게 그 얘기의 결과물을 보고 있으니 참 흥미진진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