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본격적으로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가 끝을 향하는 중이다.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입은 나는, 인사성 바르고 환영받는 호인 컨셉으로 세팅했다. 하지만 변신한 내가 아직은 나에게도 익숙하지 않았다. 잠시만 방심해도 예전의 퉁명스러운 말투가 툭하고 튀어나와 자신감을 떨어뜨리곤 했다.
특히나 가족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그랬다. 가족은 너무나 익숙한 관계여서그런지 의식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나의 예전 말투와 행동을 자연스럽게 소환해 이전의 나로 되돌려 놓았다. 새로 세팅한 내가, 나에게도 익숙해질 때까지는 가족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나의 새로움이 습관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유지할 시간이 필요했다.
가족이 변화에 수용적이라면 문제 되지 않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안정을 우선시하고 삶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려 드는 것이 보통의 풍경이다.
만약 평범하게 사는 게 행복이라고 말하는 가족과 문제없이 화목하기만 한다면, 변화와 발전과는 점점 멀어지고 평범한 상태에 안주하게 된다. 반면 진취적이고 직업적 변화와 발전을 덕목으로 삼는 가정에서 자랐다면 개인적 휴식이나 안정적인 가정 유지가 숙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의 프로그램을 입력'시켜 준 뿌리가 가족관계다. 반복되는 반응들이 고착화되어, 개인의 입장이 정리되기도 전에, 내 삶의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대부분이 형성되게 된 뿌리다. (사실 그 당연함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다.)
나는 익숙한 울타리를 벗어나 나라는 기준을 새로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가족관계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선언해 보자. 십중팔구는 기존의 익숙한 상태로 되돌리려는,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하려 드는 것 또한 균형의 법칙이니 원망할 것도 없다. 모두가 맞다고 생각하는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뿐이니 말이다.
각별한 사이의 가족이라 할지라도, 나 자신보다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권을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관여하는 내용이 부정적이든 긍정적 이든 간에, 나의 생각이 가족의 의견으로 치우치게 되면 언젠간 문제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 안에서가 아닌 세상 속에서 중심을 다시 잡고 새로운 나의 모습으로 힘껏 밀고 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