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실적 악화와 금융기관 부실화의 이중주
지난 시간에는 1980년대 초반의 외채 위기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오늘은 90년대 후반 외환위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지난 번 글을 못 본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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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사저널.
1997년 외환위기를 다룬 환타지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관료와 한국은행이 외환위기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당시 국채 연구기관에 근무하다, 증권사에서 이코노미스트로 일한 경험을 기본으로 말씀드리면 말짱 '구라'에 불과합니다.
당시 한국경제는 누가 음모를 꾸미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엉망이었습니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종금사의 부실한 경영("시장의 기억5 - 외환위기 주범, 종금사 이야기" 참고)이었고, 그 다음은 기업들의 경쟁력이 형편없는 수준이었던 데 있습니다.
아래의 <표>는 당시 한국의 기업들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역력하게 보여줍니다. 자본대비 부채 배율이 4~5배 수준인 데다, 상호 채무보증 규모는 자기자본의 100%를 넘어섰습니다. 더 나아가 총자산 대비 순이익의 비율(RoA)는 0%대 아니면 마이너스였습니다. 참고로 이 숫자는 외환위기 이전인 1996년의 상황을 뜻합니다. 이자를 갚아나가기는 커녕, 순이익을 내지도 못하는 게 한국 기업들의 현실어었습니다.
출처: “한국의 경제 위기와 극복”.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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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금사만 부실했는가 하면, 한국의 은행들도 만만찮은 문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7% 초반에 불과해, 국제적인 기준(8%)를 밑돌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부실대출 비율은 1997년 말 무려 6.0%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한양건설부터 미도파, 기아차로 이어지는 연쇄적인 기업의 파산 속에서 한국 은행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결국 제일은행이 해외 사모펀드(PEF)에게 팔리고, 서울은행은 하나은행으로, 조흥은행은 신한은행으로, 그리고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은 우리은행으로 통합되는 등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벌어졌습니다.
출처: “한국의 경제 위기와 극복”.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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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꼴이 엉망이 된 상태에서 IMF에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가혹한 조건을 수용해야 했습니다. 물론 3차에 걸쳐 구제금융 조건의 수정이 있었습니다만, 재정수지의 적자 폭을 확대하지 않는 것 등 비현실적으로 가혹한 제약은 1998년 5월까지도 바뀌지 않았죠.
물론 이상과 같은 IMF의 요구는 2010년대 유럽 재정 위기 때와 비슷한 것입니다. 돈을 빌려준 채권자 입장에서 하루라도 빨리 돈을 돌려 받기 위해서는 상대를 쥐어짜야 하기 때문입니다. 금리를 인상하고 재정흑자를 요구하고 마이너스 성장을 유발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해 외환보유고를 쌓으면, 이를 다시 돌려 받으면 될테니까 말입니다.
출처: “한국의 경제 위기와 극복”.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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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리와 저성장의 결합 속에 30대 재벌 중에 11개 기업이 워크아웃/부도처리 되었습니다. 연쇄적인 기업 파산 속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은 체질이 개선되었죠. 유리한 환율 조건, 그리고 1998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금리 하락으로 사업하기 좋은 조건이 형성된 것도 컸습니다.
특히 당시 정보통신 혁명이 진행되면서 해외 수요가 늘어난 것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도 이 기회를 잘 활용한 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 기회를 놓친 기업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대우그룹과 현대전자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이 거대 기업들의 연쇄적인 파산과 구조조정은 2000년대 초반 한국 경제를 짓눌렀으며.. 당시 DJ 정부는 카드규제 완화라는 최악의 선택을 함으로써 내수경기를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맙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신용카드 위기 이야기에 대해 '데이터' 위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장의 기억6 - 대우그룹 부도와 투신사 환매중단 사태
출처: “한국의 경제 위기와 극복”. 2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