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는다는 것

색연필 그림일기

by Eli

또 기어이 뱉어버리고 말았다. 독하고 야멸차게, 사정없이. 참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더 아프고 맵게.


올여름은 비가 너무 많이 내려 텃밭의 고추가 물을 먹은 채 매달려 썩고 있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만져보면 물컹한 것이 건질 게 없다. 속이 상한다. 빨갛게 익혀 한 줌의 고춧가루라도 내보려 했지만 영 틀려버렸다. 업으로 농사짓는 농군님네들 속은 어떨까, 감히 가늠할 수가 없다. 더 늦기 전에 그나마 남은 것들 중에 제법 단단한 것만 골라 장아찌를 담갔다. 생전의 아버지는 간장물을 부어 삭힌 고추 장아찌를 좋아하셨다. 아버지 입맛을 닮은 나도 이 장아찌를 좋아하여 해마다 담그곤 하는데 올 해는 고추 수확이 시원치가 않다.


고추를 따면서 나는 냄새가 제법 독하다. 하나를 잘라 혀에 대보니 아주 맵다. 이렇게 매운 것이 장아찌로는 제격이다. 간장을 부어놓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매운맛은 순화되어 특유의 알싸한 맛만 남아 입맛을 돋우는 훌륭한 반찬이 된다. 그냥 먹어도 맛있고 다져서 칼국수나 라면에 넣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또 추석이나 설에 양념을 더해 상에 올리면 또 다른 음식이 되는 좋은 재료다.


40대까지만 해도 나는 까다롭고 거칠고 예민했다. 사람을 가렸고 맡은 일을 잘하지 못하는 동료나 후배들에게 아픈 말을 많이 했다. 말도 직설화법이었다. 맞는 말을 하는데 재수 없는 사람. 그게 나였다.

회사에 근무할 때도 이런 나의 태도 때문에 상사가 힘들어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낮은 성적의 학생을 이해하지 못했다. 똑똑했을지는 몰라도 사랑과 연민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너그럽지 못했다. 나는 뾰족하게 모난 돌이었다.


고추 장아찌를 담으며 생각한다.

이토록 매운 고추도 간장물 속에서 맛있게 익어 본래 매운맛을 감칠맛 나게 하는 데, 내 안의 독한 기운들은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나야 감칠맛 나는 맛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매운 말과 행동은 가족은 물론 관계를 서먹하게 만들고 멀어지게 한다. 매운 고추의 맛은 입과 위를 맵게 할 뿐이지만 나의 독한 말과 기운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소중한 관계를 망가뜨릴 수 있으니 두렵다.

정년이 코 앞인데 나는 아직도 매운 고추다.

아무래도 간장물을 더 부어 달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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