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나의 자존감이 바닥일 때

리분동지 신혼(그림) 일기

by Jessie







내가 한국에 돌아오는 일을 미루고 미루었던 건 서른이라는 나이가 주는 무게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력’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에 대한 부재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른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회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고 또 무거웠다. 경력의 부재를 따라가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강남에서 살아가기 위해 응당 견뎌야하는 출퇴근 지옥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차가운 사람들 그리고 보여지기 위해 애써 노력해야하는 것들이 그랬다.






그는 어깨를 웅크리고 동그랗게 몸을 말아 애써 잠을 청하는 나에게 언제나처럼 이야기를 건냈다. 그것은 언제나 같은 레퍼토리의 것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는 마침내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곤했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나는 언제나 내가 아끼는 풍경 속의 주인공이 되었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매일 그러했던 것처럼 민트색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땀을 흘리며 달리고 있었다. 내가 나를 아끼고 또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가장 처음의 시간, 나는 언제나 러너스 하이를 위해 달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나는 호주에서 지낸 4년이라는 시간동안 참 많은 일들을 해왔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3년이나 참가했던 '깁챌린지'라는 대회일 것이다. 700킬로미터의 사막을 몇 백명의 사람들이 자비를 내고 참가해 사막을 건너는 이 대회에서 나는 ‘내’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뜨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그 따뜻한 눈빛의 사람들 속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방향이 더 빛을 낼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몇 번이나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그가 이따금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별한 경험은 7200킬로미터의 호주 대륙을 가로질러 횡단한 일이었는데 덕분에 내가 떠올리는 호주는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가 아니라 ‘붉은 흙먼지가 날리는 아웃백’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호주 원주민으로 기억되었다. 나는 날 것 그대로의 호주를 온 몸으로 경험하면서 나라는 인간이 살아내는 하루 그리고 일분 일초를 그리고 대자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건함을 떠올리며 반짝거리는 존재로 호주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인생을 바꿔준 가장 큰 터닝포인트는 아마도 ‘산티아고 순례길’이었을 것이다. 5년간 꿈꿔왔던 꿈을 목표로 만들고 또 다시 계획으로 만들어 실천했던 그 특별한 경험은 언제, 어느 순간에서든 내 손을 이끌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언제나 스페인을 걸어서 횡단했다는 나의 경험에 엄지를 치켜 세우곤 했는데 나 역시도 인생을 살아가며 내 스스로에게 가장 큰 용기가 된 일이 바로 산티아고 라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그는 내가 '한국'이라는 현실에 돌아와 잊어버린 기억들을 몇 번이고 되짚으며 나에게 소중했던 것들을 일깨워주곤 했다.







물론, 그의 수많은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새 불면의 증상이 사라진 나를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곤 한다. 그는 내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 미국과 스페인, 호주, 제주도와 같은 흔적들을 열심히 여행하다가 결국 모든 체력이 다하고 만다. 그 즈음에야 그는 내가 꿈나라로 이미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는 허무할테지만 나는 나의 지난 흔적들을 애정있게 들여다봐주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의 지난 시간들을 자랑스러워 해주고, 그 추억들로 하여금 내 스스로가 더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함께 길을 찾아주는 그에게 언제나 고맙기만 하다. 차마 혼자서 용기내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을 이제서야 뒤돌아보게 된 것은 내 곁에서 나를 반짝이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밤, 부숴진 마음을 주워들고 그에게 온다. 그는 부숴진 것들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예술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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