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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Dec 04. 2022

사랑의 조건

마법 같은 동반자는 동화 속의 왕자와 공주다.

책의 제목이 중요하다.


학교 도서관 3층 어문학 자료실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검색지를 3층 담당 조교에게 주고 내가 원하는 책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노안 때문에 검색지의 깨알 같은 글자와 서고에 꽂혀 있는 책의 분류 스티커의 글자가 잘 안 보인다. 보통 이런 대기시간에 입구 주변의 신간(최근에 구입하여 아직 서고에 자리를 잡지 못한 책) 코너를 훑어 본다. 꽂혀 있는 50여 권의 새 책들 중에서 제목이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었다. 두껍지 않아 부담스럽지도 않고 제목이 내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사랑의 조건.


사랑이란 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유발 하라리의 생각에 이미 동의하지만( https://brunch.co.kr/@jkyoon/429 ) 본능적으로 사랑이란 단어에 손이 갔다. 그것도 조건이라니... 조건만 맞추면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그렇게 James Hollis와 처음 조우했다. 스위스 취리히의 융 연구소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했으며, 미국 워싱턴에서 융 학파 정신분석가로 활동 중이란다. 융 심리학 대중서 15권을 집필했으며, 그중 여러 권이 이미 번역되어 있단다.


1998년에 출간된 'The Eden Project: In Search of the Magical Other'의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이 '사랑의 조건'이다. 홀리스에 따르면 현대인들이 친밀한 관계에서 겪는 심리적 고통의 근본 원인은 바로 '마법 같은 동반자(Magical Other)'라는 환상이다. 홀리스는 이 환상을 깨뜨리며,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하고 진정한 자기를 찾는 여정에 뛰어들 것을 제안한다.


신체, 정서, 인지, 증상, 꿈에 등장하는 이미지 등을 통해 자기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표현할 수 있다 해도 자기 자체는 알 수 없는 존재다. 자기가 가진 의도를 '읽어'내는 것은 융 심리학 기반 심리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치료 과정의 핵심이다. 중략 상처받기 쉬운 자아는 자기란 영원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 제임스 홀리스의 '사랑의 조건' pp. 22-23 -


1930년대에 융이 지적하기를 '부모는 자식에게 신경증을 일으키는 가장 주요한 원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아이에게 가장 강력한 정신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부모가 이루지 못한 삶이다. 아이는 부모가 살면서 이루지 못한 모든 것을 보상하는 방향으로 무의식 중에 끌려간다'  


융의 이 생각이 진리라면 아무나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거대한 생각 또는 콤플렉스가 두 가지 있다. 실상은 둘 다 거짓이며, 우리는 그 사실을 의식하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이를 부정하고 숨기며 정당화한다. 첫째는 '불멸의 환상'이다(  https://brunch.co.kr/@jkyoon/461 ). 인류를 이끄는 다른 하나의 거짓 생각은 바로 '마법 같은 타자 Magical Other', (  https://brunch.co.kr/@jkyoon/452 ) 마법 같은 동반자라는 환상이다. p.64


우리는 알고 있는 것, 익숙한 것을 추구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리 상처가 된다 해도 말이다. p.67


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청년일 때는 성적 흥분, 중년일 때는 뻔한 익숙함, 노년일 때는 상호의존에 갖다 붙이는 말이다."라는 미국 시인 John Ciardi의 냉소적인 표현으로 사랑을 제대로 정의할 수 있을까? 중략 과연 사랑을 일반적으로 정의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p.69


존 시아디의 표현에 왠지 격한 동감이 가는 것은 나도 냉소적이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는 것은 혹시라도 넘어지는 순간 의지하기 위함이라고 누가 그랬다. 이즈음 오래 살다 보니 환갑 즈음에도 새로 결혼하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도 있다. 지팡이나 보행보조기 같은 배우자를 찾고 있으면서 진정한 사랑을 찾아 결혼한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배우자와 원만하지 못한 관계를 끊지 못하고 힘들게 살고 있는 친구가 그랬다. 지금 이 나이에 이혼하고 재혼한다는 것은 그동안 어렵게 쌓아 놓은 관계(특히 자식들과의 관계)들이 엉망이 될 것 같아 용기가 없어 차마 못하겠다고...


융은 삶이 "두 가지 거대한 신비 사이에서 일어나는 짧은 에피소드"라고 말했다. 우리의 과제는 이 짧은 삶 속에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p.216


아마도 거대한 신비는 탄생(Birth)과 죽음(Death)이겠지. Life is BCD( https://brunch.co.kr/@jkyoon/206 )라던데 많은 선택(choices)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에피소드를 만든다. 그 에피소드가 의미가 있건 없건 상관없다. 워낙 짧은 'shorts'같은 인생이라 의미 따위가 있을 수 없다. 그냥 흘려보낼 뿐이다. 여기서의 에너지는 결국 시간이다. 인생이 주어진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의미 없고 재미조차 없는 일에 시간 쓰지 말라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며칠 동안 '사랑의 조건'을 읽으며 행복했다. 그러면서 융의 심리학 이론이 종교에 버금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융의 많은 이론과 저작들은 성경에, 융 학파 정신분석가들은 예수님의 제자와 사제들에 비유된다. 종교란 것이 결국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구원받고자 함 아닌가? 짧은 생을 살아내면서 고통스러운 불안, 우울 그리고 신경증으로부터 벗어나 안정감, 행복감, 만족감을 주는 것이라면 모두 종교 아닌가?


용이 아니고 융을 받드는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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