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가려고 퇴사한 28살 여자 이야기: 34일의 아프리카 캠핑 여행
나미비아 사막 한가운데 있는 캠핑장. 찬물 한줄기가 쪼르르 흐르는 나무 칸막이 하나 빼고는 어딜 봐도 모래뿐인 황량한 이 곳.
여기서는 우리가 트럭을 세우고, 텐트를 치고, 캠프파이어를 피우는 곳이 곧 우리의 집이 되었다.
캠프파이어에 둘러앉아 스프링벅(남아프리카산 작은 영양), 브로콜리, 당근, 그린빈을 넣은 스튜와 매쉬드 포테이토를 먹고 나니 어느덧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양철 컵에 루이보스티를 한 잔 담아 들고 헤드랜턴에 의지해 길을 비추며 물웅덩이를 찾아 갔다. 물을 마시러 오는 야생동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메나, 프랭크, 존, 마리우스와 함께 물웅덩이가 보이는 나무 아래에 철퍼덕 자리 잡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시간 쯤 지났으려나? 물웅덩이로 뭔가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건장한 근육질 몸에 기다란 두 개의 뿔을 달고 있는 오릭스(큰 몸집에 뿔이 길고 곧은 영양)였다.
우린 약속이나 한 듯 대화를 멈추고, 어둠 속에서 홀연히 등장한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그는 물웅덩이 앞에 서서 매우 오랫동안 우리 쪽을 응시했다. 우리도 숨을 죽이고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긴 다리를 조심스레 움직인 뒤, 천천히 목을 낮추고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걸음을 옮기고, 목을 스르르 낮추고, 물을 마시고, 다시 목을 서서히 들고... ... . 이 동작 하나하나가 어찌나 느린지 1/50배로 틀어 놓은 슬로우 모션 영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오릭스 서너 마리가 더 수풀 속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물을 마시다가, 무언가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가, 한참동안 멍하니 우리 쪽을 응시하며 서 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겨 물을 마시기를 반복했다.
서쪽에서부터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리 없이 건조한 번개가 쳤다. 붉은 나미비아 사막 먼지로 인해 그 섬광은 붉은빛으로, 주홍빛으로 찬란하게 대지를 빛내다가 사라졌다. 번개가 칠 때마다 오릭스는 때론 눈부실 만큼 새하얀 색으로, 때론 타들어갈 것 같이 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섬광에 색색으로 빛나는 오릭스의 굴곡진 등, 날렵한 뿔, 매끈한 다리의 자태는 말로 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서너 시간 쯤 흘렀을까. 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프리카 대자연이 선사해주는 환상적인 무성 영화를 감상했다.
한쪽에서는 번개가 형형색색 천연 조명을 비춰주고 있고, 바로 눈앞에서는 동물원에서조차도 본 적 없는 야생동물들이 그림처럼 물을 마시고 있었다. 별은 너무나 많아서 어디를 쳐다보든 끝도 없이 쏟아졌으며,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셀 수도 없이 많은 별들이 나뭇가지 사이사이에 촘촘히 박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돌연 수많은 모래알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우리 얼굴을 따끔따끔 찔러댔다. 폭풍우가 곧 우리 캠프를 덮칠 터였다.
하지만 폭풍우를 기다리는 그 고요한 순간마저 너무나 아름다워 도저히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숨 막히게 경이로운 무성영화 속 점 하나로 존재할 수 있었음에 눈물 나게 감사해서, 화산재에 덮여 사라진 도시 폼페이처럼, 모래바람을 맞으며 이대로 모래 속에 영영 파묻혀 버린대도 황홀할 것 같았다.
2016년 6월, 개인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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