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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Feb 22. 2024

결국, 사람!

박완서 읽기 16. 박완서 장편 소설 『오만과 몽상』③

드디어 박완서 장편 소설 『오만과 몽상』1, 2권을 완독했다. 학원 수업하고, 집안일 하며 가족들 끼니 챙기고, 매일 브런치에 글까지 쓰려니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그래서 더욱 간절하기도 하다. 나이 드는 것은 반가울 게 없지만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와서 하루 종일 소설책을 끼고 살 수 있다면, 그건 무척 행복한 일일 것 같다. 물론 눈이 침침해지고 허리와 엉덩이가 아프고 집중력이 떨어져서 지금처럼 책을 즐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있지만 지금 마음 같아서는 시간만 있다면 책만 보며 평생 살아도 좋을 것 같다. 박완서 작가는 나이 40부터 작가 생활을 시작해 80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40년을 읽고 쓰며 직업 작가로 사셨으니 내게는 참으로 부러운 인생이다. 나와 40년 가까운 나이 차이로 인해 가끔 박완서의 소설 속 시절이나 언어가 생경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우선 소설이 재미있으니까 끝까지 다 읽게 된다. 그리고 다 읽고난 후에는 어차피 인간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


동학군은 애국투사를 낳고, 애국투사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도배장이는 남상이를 낳고...

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 친일파는 탐관오리를 낳고, 탐관오리는 악덕 기업인을 낳고, 악덕 기업인은 현이를 낳고...


주인공 남상이와 현이의 갈등은 동학군, 애국투사의 자손과 매국노, 친일파 자손의 대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돈이고, 바로 풀지 못한 오해 탓이다. 가난한 남상이는 잘사는 현이에게 한 번 객기를 부리며 절교를 선언했고 시간이 흘러 다시 되돌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부잣집의 현이는 돈으로 남상이를 판단해본 적이 없던 터라 믿었던 남상이가 조상까지 들먹이며 우정을 잘라내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현이에게는 자존심이 상했다기보다는 절친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마음이 훨씬 컸다. 현이의 복수 방법은 집안의 도움 없이 남상이가 바랐던 의사가 돼 보이는 것이었다. 현이는 이를 갈고 가난 속에서 결국 의사가 되고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남상이는 여전히 어려움 속에서 살다가 무심코 현이를 찾아가지만 이미 둘 사이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부유층은 대부분 보험에 가입이 돼 있으니까 터무니없이 싼 비용으로 의료 혜댁을 받게 되고. 그러니 저절로 감기 꼬뿔, 어젯밤 숙취에까지 종합병원 특진을 청하는 호강을 하게 되고 병원은 그 몫을 가난한 일반환자들이 병원비가 무서워 적절한 시기를 놓치고 큰 병이 된 후에야 집 팔고 땅 팔고 빚까지 얻어서 마련한 원한 맺힌 돈으로 충당을 한다면 얼마나 가공할 불합리냐? 끔찍한 일이지.
p.19

그는 결코 그의 아기를 부자처럼 키우고 싶거나 부자로 만들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아기만은 돈 같은 건 의식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자라도록 하고 싶었다. 그가 그의 가문의 빛나는 기적으로 움트지 못한 게 순전히 가난의 무게 때문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걸 제거하는 일에 그는 매일매일 조바심했다.
p.218


80년 대에도 그 후로 40년이 흐른 지금도 빈부의 격차는 우리 사회의 문제이자 자본주의의 당연한 현상으로 인식된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가난과 부가 자식에게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흔하디 흔하다. 그런데 돈만 세습되는 게 아니다. 삶의 방식,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배우자를 정하는 기준, 자식을 키우는 교육 철학 등 많은 것들이 세습된다. 좋은 것만 물려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돈에만 닿아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중한 것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식 세대까지 전해지는 것이다. 나는 우리 아들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어쩌면 두 아들은 돈을 가장 원할지 모르지만 이미 그건 글렀다. 그렇다면... 고민이 깊어진다.


한 남자에 의해 자신이 재봉틀 기름으로 소모되는 운명을 면할 수 있기를 바라는 영자의 꿈과 여자도 사람이란 걸 인정해주는 남자만 만난다면 사랑을 하고프다는 성혜의 꿈은 그 여자들에겐 각각 최소한의 겸손한 꿈이겠지만 현에겐 아니꼽도록 과람해 보였다. 그는 그 두 개의 작은 꿈을 동시에 유린할 수 있다는 데 가학적인 쾌감을 느꼈다. 가책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받을 가책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변명까지 벌써 마련해놓고 있었다. 미싱공에게 의사가 가당치도 않은 것처럼 간호원에게도 의사는 과람하거든. 나는 내 가치를 스스로 알고 있고 거기 맞게 처신하고자 할 뿐이야.
p.59

그는 고통스럽지만 보람 있는 삶을 예감했다. 남의 생명과 고통을 위한 헌신까지도.
그 바보 같은 계집애는 죽음으로써 그로 하여금 생명에 눈뜨게 했다. 하마터면 생명에 눈먼 채 의사가 될 뻔했다. 두려운 일이었다.
현은 그곳을 떠나기 전에 위령탑에 들꽃을 바치고 싶었다. 그러나 들판에 서려 있는 건, 아직은 봄의 예감일 뿐 들꽃은 피어나기 전이었다.
p.272


현의 곁에서 다른 존재감으로 살고 싶었던 영자는 남상이의 아내가 되어 살아간다. 영자는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아이를 갖게 되면서 삶의 의지를 가진 듯하다. 하지만 돈에 혈안이 된 남상이는 아내와 아이를 죽을 위기에 빠트리게 되고 절박한 마음에 의사가 된 현에게 도움을 청한다. 현은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영자를 남상이의 아내로, 환자로 만나게 되고 결국 영자와 아이는 죽음에 이른다. 영자는 죽었지만 그녀로 인해 남상이도 현도 삶의 전환을 맞는다. 사람보다는 돈을 중요시했던 남상이는 이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었고, 의사의 소명을 지니지 못했던 현은 소설의 마지막에 사람을 살리는 의사로서의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결국 사람이다. 아무리 안 좋은 환경에 놓였던 사람이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런 사람을 너무 늦게 만나지만 않는다면, 그럼 사람 그런 기회를 놓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박완서 장편 소설 『오만과 몽상』을 덮으며 생각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건 나 자신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을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그래서 정말 하루하루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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