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에 퇴근하는 기분 마음껏 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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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이 없던 월요일 오후, 4시에 퇴근한다. 이 정도면 거의 한낮이다. 다섯 시만 돼도 거리에 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그 시간대는 누가 봐도 퇴근하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주요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에 모인 사람들은 다 퇴근하는 사람이라고 봐도 된다. 그들은 개인으로 혼자 움직이고 있지만 그 속에 분명하고도 커다란 흐름이 존재한다.
하지만 4시에 퇴근? 4시는 잘 없다. 없어, 없다고. 아니, 있어도 대여섯 시 대와 같은 커다란 하나의 흐름이 아닌 갠플이기 때문에 눈에 안 띈다고요.
게다가 지금은 마침 딱 벚꽃이 만개한 시즌이다. 만개한 아름다운 벚꽃 풍경을 볼 수 있는 건 일 년에 며칠 안 되는 아주 귀하디 귀한 시즌이다. 회사 다니던 시절에는 아침 출근길에 급하게 보고 (ㅠㅠ) 항상 퇴근하고 밤이 되어서야 조금의 여유를 가지고 벚꽃을 겨우겨우 볼 수 있었다.
하지만 4시에 퇴근하면 평일 한낮에 벚꽃을 실컷 볼 수 있다.
집과 아르바이트하는 곳은 멀지가 않다. 회사 건물이 바로 지하철역 코앞에 있으며 마침 또 집 앞의 지하철역과 같은 색깔의 노선이라 환승할 필요도 없이 딱 여섯 정거장만 가면 된다. 그러니 아침에 출근할 때도 편리하다.
다만 지하철역에서 집까지는 애매한 거리로, 10분 안되게 조금 걸어야 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그래서 퇴근하고 진짜 빨리 오면 사무실에서 출발한 지 25분 내지 30분 안에 집 앞에 도착한다.
그대로 집에 들어가긴 아쉽다. 바깥은 벚꽃이 한창이다. 이대로 집 앞의 천변으로 간다. 한낮의 햇살과 바람과 하늘하늘 흩날리는 꽃잎들. 올해는 유난히 이맘때 비가 자주 왔다. 보통은 벚꽃이 한번 쫙 핀 다음에 비가 와서 다 사라지는 느낌인데 말이다.
올해는 벚꽃이 아직 찔끔 폈는데 벌써 비가 온다. 그러고 다시 또 찔끔찔끔 피어나고 있어서 아직 만개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소식이 또 있네? 이러다 보니 벚꽃은 볼 수 있을 때 봐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회사 다닐 때는 휴가를 내던 아님 반차를 내서 억지로라도 아니 혼자서라도 꿋꿋하게 벚꽃을 보러 다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았으니까. 이건 인간의 존엄성 같은 문제는 아니다. 생존의 문제라고 하기엔 너무 앞서 갔다. 또한 의식주와 관련된 문제도 아니니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철저하게 나의 멘털 관리를 위해 중요한 문제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잠깐이라도 보고 눈에 담을 여유조차도 갖지 못한다면 그게 삶일까? 무엇을 위해 돈을 벌고 무엇을 위해 사무실에 갇혀서 대단한 일을 하는 거처럼 일 년에 한 번 있는 벚꽃도 눈에 담지 못할 정도로 일에 매달려야 하는 걸까?
내가 의식적으로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부분-적어도 휴가를 내는 것-을 할 수 있다면 그것 정도는 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 거다.
출근길이나 퇴근길같이 지나가는 길에 잠깐 보는 게 아니라 휴가를 내서 시간에 쫓기지 않고 오로지 ‘그것을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위한 시간을 내는 것. 그렇게 만들어낸 귀한 시간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에 쓸 수 있는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것.
그렇게 천변에서 벚꽃을 보며 30분가량 산책을 하고 들어와도 다섯 시 밖에 되지 않았다. 오늘 가져간 점심 도시락통을 설거지통에 담가두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뒤 중국어 공부 준비를 시작한다.
원래는 퇴근하고 돌아오면 배고프니까 저녁부터 먹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면 노곤노곤해져서 공부에 집중이 전혀 되지 않았다. 책을 펼쳐놓고 있어도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머릿속이 멍해져 결국 꾸벅꾸벅 졸았다.
지금은 아직 다섯 시니까 저녁은 좀 이따 먹으면 된다. 간식정도 먹고 두어 시간 힘들게 공부를 한다. 그렇게 7~8시 정도까지 공부를 하고 저녁을 먹는다. 이 이후로는 집중력이 조금 떨어져도 괜찮다. 이미 중요한 건 앞선 두 시간에 다 했으니까.
하지만 중국어 공부 말고도 할 일이 많다. 매일매일 하는 원서 읽기를 빼놓을 수 없다. 요즘 일본어 원서는 미즈무라 미나에의 <본격소설>을 읽고 있다. 너무 어려워서 하루에 2페이지를 겨우겨우 읽는다. 그리고 영문판과 불어판을 동시에 펼쳐놓은 즉 셀프로 만든 영불대역본으로 프랑스어판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더듬더듬 읽어 내려가고 있다. 이것도 빨리 끝내면 30분이고 오래 걸리면 40분도 넘어간다.
2시간 일찍 퇴근하니까 퇴근 후에 이런 걸 하는 삶이 가능한 거다. 2시간 일하지 않는 대신 돈을 안 받으면서도.
아까 양재천에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무리를 보며 생각했다. 중국어 시험은 이번 주말에 끝나니까 다음 주부터 아르바이트 스케줄은 원래대로 9-6로 돌리면 된다.
그런데 아예 다음 주부터 스스로 4시에 퇴근하는 걸로 스케줄을 박아버려? 어차피 관리자도 뭐라고 안 할 거고 나는 4시에 퇴근하고 그 이후로 수영을 가든 자전거를 타든 산책을 하든 시간을 보내는 거지. 하루 근무 시간 총 8시간에서 2시간쯤 덜어내는 거, 어때?
하루에 덜어내는 2시간을 일주일 5일로 환산하면 총 10시간을 줄이는 셈이 된다. 그럼 주 30시간 근무를 하게 되는구나. 내가 어딘가 정규직에 묶여있다면 주 30시간을 일해도 같은 돈을 받겠지. 하지만 여기는 시간당 시급을 계산하는 알바이기 때문에 일하는 시간을 줄이면 무조건 100프로 손해다.
그래도 나는 역시, 내 시간을 확보하고 싶어졌다.
참고로 몇 년 전, 팀장님께 주 35시간제를 하고 싶다고 폭탄선언을 했던 때의 시리즈를 링크한다.
이건 내가 예전에 팀장님한테 제안했던 주 35시간보다 더 파격적이다. 그런데 일하다 보면 주 35시간도 솔직히(?) 많다. 프랑스가 주 30시간 근무인 걸로 알고 있는데 진짜 부럽다.
내가 이번 주에 간접적으로 주 30시간제 근무를 체험해 봤는데 이 정도는 돼야 삶의 질과 만족도가 팍 올라간다고 느꼈다. 얼른 우리나라도 주 30시간제 근무를 도입했으면 좋겠다. (라고 또 이렇게 30년쯤 앞서 나가버리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