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3일차> 로마 여행에서 놓치거나 놓칠뻔한..
<이탈리아 5일차> 사기캐 토스카나에서 관광 대신 여행
1.
감정이 보이면 안된다. 무표정해야 한다. 몸의 선이 드러나도 안되고, 살이 노출되는 것도 안된다. 옷의 색깔은 빨강과 파랑.. 유럽의 회화에 수없이 등장한 성모마리아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가 많았다. 규범에서 해방되는 과정이 인류 역사구나.
우피치 미술관의 마이리얼트립 가이드 마리 쌤에게 설명을 듣다보니 성모마리아 변천사가 눈에 보인다. '수태고지'란 난해한 이름이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알려주는 장면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 세월이 지나면서 수태고지 그림에서 마리아가 변한다. 내가 홀로 임신했다고? 황당함이 드러나는 표정도 있고.. 아무렴, 그런 당혹스러운 통보에 동정녀가 담담하고 겸손할 수 있나?
2.
옛 이야기를 듣다보니 온통 스캔들. 말하자면 사랑 얘기고, 동성애가 심심찮게 나온다. 메디치 가문이 끝내 대가 끊긴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고대 철학자부터 예술가들이 동성애는 후대에 전해질 정도로는 알려진 일. 한국 사회는 완고한 유교의 규범 덕에 오랫동안 숨기는데 급급했기에 덜 해방된걸까?
3.
인간이 후손에 전하는 것은 결국 이야기. 그리고 직접 만든 창작물. 건물이든 미술품이든 음악이든 이야기를 담은 무언가다. 중세 천년이 오로지 신의 뜻만 이야기했다면 단테와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 인간이 등장하는 르네상스가 경이롭다. 그래도 왕족 귀족 자본가만 등장하던 그 시절을 지나 시민이 전면에 나서는 계기, 프랑스 혁명이 있었다면.. 21세기 분기점은 뭐가될까.
우피치 미술관 3층에는 당대의 셀럽 초상화가 복도 천장을 따라 줄지어 걸려있다. 왕족이고 귀족이고 뭐 그랬겠지. 그들은 잊혀졌다. 메디치 가문은 그 권력과 자본으로 후원한 예술가 덕분에 이름을 남겼다. 피렌체에서는 삶을 최대한 즐기겠다는 생각이 남는다.
4.
산마르코 수도원 박물관에서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를 보다가 생각이 갈래갈래 뻗쳤다.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는 둘 다 부드러운 표정. 파스텔톤의 은은함은 벽화라 그랬나. 수도원의 계단을 올라가면 딱 보이는 그림도 인상적인데, 2층 수도사들의 기숙사 같은 방도 놀랍다. 그림 하나에 아주 작은 창문만 있는 두 평 남짓한 공간이 수십개다. 작은 방과 달리 비블리오테카, 도서관은 크고 넓다. 수도사들은 성경을 옮겨쓰고, 그림을 그리며 성서를 전하는 일을 했겠지. 산타마리아노벨라 수녀원의 수녀들은 약초로 화장품을 만들어 오늘날 유명해졌고, 수도사들중 뛰어난 크리에이터는 남았다. 필리포 리피 같은?
5.
아카데미아 미술관 앞 고서점. 홀딱 반한 공간. 쇼윈도우에 종이로 만든 배와 모빌, 아이다 책이 있다. 우어어..
6.
우피치 미술관이 영국박물관, 루브르와 함께 유럽 3대 미술관이라는게 피렌체 사람들 얘기인지 정설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작품만 있다”는 우피치 자부심은 인정한다. 이집트 등에서 약탈해온 것 없이 모두 이탈리아, 특히 동네 조상들 작품이 많다. (3대라고 하면, 스페인 프라도 박물관이 광광할 거란 태형님 말씀이 옳다ㅎ)
9년 전 피렌체 여행에선 중세를 끝낸 단테에 빠졌다. 그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으로, 신에게서 인간으로 세상의 중심을 바꿨다. 그때 엄청 신기했던게 단테, 지오토, 미켈란젤로, 다빈치, 마키아벨리가 모두 피렌체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갈릴레이는 인근 피사 출신. 당대의 피렌체는 대체 뭐냐. 시대를 바꾸고 세상을 뒤집어 버린 사람들이 인구 5만도 안되던 동네의 형 동생, 아저씨.. 신의 뜻 대신 인간을 소환한 그들은 눈총과 박해에 굴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온갖 일화가 성격 별로인 천재ㅎ 튀는 이에 대한 시기와 질투도 있었겠지. 피렌체는 두오모와 성당, 궁전도 멋있지만 그 사람들에게 매혹된다.
두둥.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에는 그들이 있다. 미켈란젤로(1475~1564), 갈릴레이(1564~1642), 마키아벨리(1469~1527)의 묘가 있다. 작곡가 로시니, 두오모 ‘천국의 문’ 기베르티도 잠들어 있고, 단테(1265~1321), 다빈치(1452~1519)의 가묘? 기념비가 있다.
니콜리니는 잘 모르지만 그의 묘 조각상은 뉴욕 자유의 여신상 원조 아닌가 싶다.
후대 위인들도 이 거대한 전당에 자리를 얻었는데 라디오의 아버지라는 굴리엘모 마르코니는 무선 전신 기술을 발명해 190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원자폭탄 아버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핵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도 여기에..
오전에 체크아웃 후 인근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짐을 싣고.. 우리는 피렌체를 조금 더 즐겼다.
점심은 두오모 인근 길거리 샌드위치를 먹고 싶었는데.. 줄이 넘넘넘 길어서 포기ㅠ 서울 맛집 저리가라 줄이 길었다. 궁금한 분은 여기. 테이블도 없어 길바닥에서 먹어야 하거늘 다들 행복하게 먹더라.
적당한 곳을 찾다가 골목에 까치오에페페 Cacio e pepe 라는 식당이 있길래 카치오에페페 파스타(12)와 쇠고기 스튜(16). pici 생면에 치즈만으로 맛을 내는 이 단순한 파스타가 좋아서 이집저집에서 시도한다. 이 메뉴 추천해준 고일환님 그라찌에.
그리고 피렌체의 마지막 일정은 전날 간신히 구한 아카데미아 미술관. 오후 2시 표인데 15분 전에 가도 이미 줄이 길다.. 15분 단위로 사람들을 입장시키는데 우피치 보다 훨씬 북적댄다. 이 미술관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 그리고 생각보다 더 감동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5.17m? 압도적이다. 예전엔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전의 입구에 복제품만 보고 갔는데.. 관광객에겐 좋았는제, 진품은 아우라가 다르다니. 기분일까?
다비드는 사실 두번째 방에 나오고 미술관 들어서면 '사비니 여인의 강간'(The Rape or the Sabine Women)조각이 보인다. 로마 건국 이야기에 보면, 여자가 부족해 이웃나라 사비니의 여자들을 납치하기로 하고.. 로물루스가 사비니 사람들을 초대했다. 환대하는 척 했던 로마인들은 취한 사비니 남자들을 제압하고 여자들을 약탈했다. 로마 남자들은 그 여인들을 아내로 맞았다. 로물루스도 사비니 왕의 딸인 헤르실리아와 결혼했다. 이후 사비니 남자들이 절치부심, 쳐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아이를 낳은 사비니 여자들이 중재를 했다는 그림이 유명하지..
조각의 여인은 절박한데 육감적이다. 근육질 로마 남자가 남편을 제압하고 여자를 꼼짝못하게 한다. 로마인들은 이걸 신화 마냥 남겼지만, 사실 무척 잔혹한 서사다. 남녀의 몸이 모두 아름다워서 저 조각가 잠볼로냐에게 화가 날 뻔..
아카데미아의 그림들은 엄청 멋진 작품들이 좀 있는데, 다닥다닥. 공간이 넓지 않은데 작품이 많다. 사람도 많다. 와중에...
이게 그림이 아니라 자수를 놓은 천이다.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 제단을 장식하던 물건이라는데, 등장인물의 눈코입, 옷자락의 음영까지 다 자수.. 이걸 한땀한땀... 자본의 위력인가, 신앙의 힘인가. 1336년에 저걸 만들어낸 캄비오 Jacopo de Cambio 라는 분 존경한다.
미술관 한 구석 영상에서 알게된건데.. 금박을 사용한 그림은 정말 한땀한땀 뾰족한 것으로 세공한다. 로렌초 모나코란 분의 저 작품은..성모마리아의 옷자락과 바탕이 온통 그 한땀한땀. 파란색 염료가 없던 시절 그 비싼 청금석을 왕창 써서 진한 파랑을 표현하고, 금박과 세공을 엄청나게 투입한 작품이다. 저게 부의 척도였을라나. 가는 곳곳 수태고지 작품인데.. 역시 흐릿해진 금박에 들인 공을 생각하니.. 참 애쓰셨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임신을 알리는 장면은 정말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모양이다. 한때는 신화, 한때는 성서의 이야기 뿐이었구나
오후에 피렌체를 떠났다. 다음 여정은 피스토이아. Pistoia.. 여기서 또 한 번 신선한 감동.. 이 작은 도시의 산속 숙소 L'Otello B&B는 그림 같은 토스카나 뷰.. 집주인 엔리코는 2차대전 참전용사인 할아버지에게 포도밭과 이 집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오후엔 아직 태양이 뜨겁지만, 내일 아침에는 뜰의 테이블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힐링 예정.
거실도 부엌도 훌륭. 2층에는 침실 2개.. 식빵과 크로아상, 파이, 잼과 버터, 햄과 치즈, 물, 쥬스까지.. 모든걸 마음대로 먹으라고.. 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부킹닷컴 찐 회원인 소연이 무료 조식을 챙긴 덕분이라고. 하여간에 엄청 맘에 듬.. 이 숙소는 2박에 296유로. 인당 1박에 37유로쯤.
이 숙소는 다만.. 좁은 시골길을 들어오는게 조금 어려운데.. 덕분에 저녁은 배달음식으로.. 이건 친절한 엔리코가 제안했고, 다 해줬다.. 이렇게 토스카나의 또다른 밤이 깊어간다.
이 동네 와인이라고 해서 주문한 18유로 화이트와인. 피스토이아의 솔라나 와인인데 비비노 평점이 4.2 동네 와인 3병에 피자 2판, 샐러드 합쳐서 77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