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처럼 하얗게

2005년 5월

by 모레

배넷 털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냥 빠지나 보다 했던 게 어느 순간 털 밭에 뒹군 듯한 나를 발견한다. 털이... 털이... 이렇게 많이 빠지는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이렇게 털이 빠지는데 흰둥이는 왜 탈모가 없을까?


그 후로 12년, 나는 블랙 옷을 포기했다. 시크 블랙? 그게 뭔데? 양말도 어두운 개통은 신을 수가 없다. 정도가 심하지 않다면 옷에 붙은 털은 그냥 키링처럼 달고 다니게 됐다.


하루라도 청소를 하지 않으면 집 안엔 마치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얀 털이 소복이 쌓인다. 그 털은 시간이 지나면 뭉쳐 작은 볼처럼 온 집 안을 굴러다닌다. 그래서 청소기 먼지 통은 매일매일 흰둥이 털 뭉치로 가득 찬다.


그땐 흰둥이가 먹는 족족 털을 생산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만큼 털이 많이 빠졌다.

이맘때 빠지는 털을 배넷털이라고 했다. 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다. 생후 12주부터 첫 털갈이가 시작되는 시기로 1~2주 정도는 폭발적으로 털이 빠지다가 서서히 줄어들지만 한 달이 넘도록 지속된다고 한다.


털을 빗으면 나오는 털 뭉치는 흰둥이 미니어처 두세 개는 충분히 만들 양이었다.


상상치 못하는 털 빠짐에 결국 성급하게 털을 밀어주었다. 그것이 흰둥이 생애 첫 미용이었다.


이 또한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 시기 이중 모를 가진 강아지들은 털을 깎을 데 신중히 해야 한다. 큰 스트레스로 잘못하면 털이 듬성듬성 나거나 아니면 아주 오랫동안 안 날 수도 있다. 그래서 너무 일찍 털을 밀어주는 것보다 6개월이 지나고 예방접종이 모두 끝나는 시기가 좋고 너무 바짝 짧게 자르지 않는 게 좋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조금 성급했다. 흰둥이 털을 몽땅 밀어버렸으니 말이다.



첫 미용을 하고 한 동안 흰둥이는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털이 없어졌으니 어색하기도 하고 마치 발가벗은 느낌도 들었을 거 같다. 벗고 있으면 창피해지는 건 강아지도 똑같은가 보다. 미안한 마음에 옷을 입혀줬지만, 흰둥이는 옷 입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피부 보호를 위해서는 미용 후 옷 착용은 필수다.



지금은 털이 빠진다고 밀지는 않는다. 여름이 다가오고 장마가 올 무렵 털을 정리해 준다. 이중털에 장모라 미용은 생존 목적에 더 가깝겠다. 처음엔 미용을 맡겼지만, 흰둥이가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해 직접 미용을 한다. 그때처럼 창피해하거나 의기소침한 반응은 사라졌다. 다만 미용 후 옷 입는 걸 여전히 싫어한다.


내 미용 실력은...... 8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흰둥이는 내가 자기 털을 엉망진창으로 밀어 놔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못생기게 만들어도, 외출 시 동네 꼬마들이 '저 강아지 털이 이상해'하고 놀려도 개의치 않는다. 상남자처럼 훗- 하고 지나가는 흰둥이 마음은 태평양일까.


지금도 새하얀 털 뭉치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여름 막바지에 잘라준 털이 아직 다 올라오질 않았지만 조금씩 풍성해지고 있다.


이 털 뭉치를 모아서 옷을 만들어 입으면 얼마나 좋을까? 꼬릿 꼬릿 고소 고소한 흰둥이 냄새가 온종일 내 몸을 감싸겠지, 꼬순내 테라피, 꽤 괜찮을 것 같은데?


일단 모아 두고 나중에 뭘 만들어야 할지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

흰둥이 털 빠지는 양이면 아마 내 방만한 흰둥이 한 마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미니어처보다는 그 편이 좋을 듯하다




1살 이전 흰둥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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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어떤 개를 원하세요?

III. 그냥 멍멍아~라고 불렀다.

IV. 흰둥이와 주전자

V. 애처로운 눈망울

VI. 눈처럼 하얗게

VII. 흰둥이 장염 극복기

VIII. 흰둥이 깁스를 하다

IX. 평범한 강아지도 특별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