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로 갈만한 걷기여행(4) 스리랑카 스리파다(아담스픽)
직장인에게 시간이 1~2주 정도 주어진다면 어떤 여행지를 선택해야 할까? 되도록 자연, 유적 등 볼거리가 다양하면 좋을 것이고, 그런 다양한 볼거리들 간 이동거리가 짧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휴가여행엔 여행지간 이동거리와 동선에 꽤 신경쓰는 편이다. 짧은 휴가에 큰 나라를 갔다가 이동에 시간을 버리느니, 오목조목 볼거리가 모여있는 곳에 가는 것이 몸도 편하고 만족도가 높았다. 그렇게 찾은 곳이 바로 인도 옆 섬나라 스리랑카였다.
스리랑카는 한국의 절반이 좀 넘는 크기의 물방울 모양의 섬나라로 영국 식민지 시절 실론(Ceylon)으로 불렸다. 바로 그 ‘실론티’의 본고장으로, 홍차 생산 세계 2위, 수출로는 1위인 나라다. 그래서 섬의 중간 산악지형엔 차밭이 펼쳐져 있고, 식민지 시절 차를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었을 기차에 고작 3달러에 타서, 아름다운 차밭을 만끽할수 있다. 인도양의 섬나라라, 사방으로 닿는 바다는 세계적인 다이빙, 서핑 포인트다. 석가모니의 이빨을 보관하고 있는 불치사, 불가사의함으로는 마추픽추급인 바위산 요새 스기나가르 등 유적들도 놓칠 수 없다. 이런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매력적인 여행지들이 모두 몇시간 안에 닿는다. 한동안 여행하기 좋은 나라를 물어보면 스리랑카를 추천하곤 했다.
*스리랑카는 실론섬 이전에는 세렌디브(Serendib)라고 불렸다고 한다. 보석의 섬이라는 뜻으로, 신밧드의 모험에 나오는 보물섬이 스리랑카다. 18세기의 영국 작가 호레이스 월폴의 소설 <세렌디브의 세 왕자>에서 이 섬이름을 따 만든 신조어가 바로 ‘세렌디피티(Serendipity: 뜻밖에 얻게 된 발견과 그로 인한 행복)’다.
스리랑카에서 비박하지 않고 며칠간 걸을 수 있는 트레킹 구간은 찾을 수 없었지만, 몇몇 매력적인 1일 트레킹 코스를 찾을 수 있었다. 일출이 유명한 스리파다(Sri Pada)와 고원지대인 호튼플레인스 국립공원(Holton Plains National Park)이 그것이다. 가장 임팩트가 컸던 곳은 아담스피크(Adam’s peak)로도 불리는 성스러운 산 스리파다(Sri Pada)였다. 스리파다는 스리랑카의 대표 산 답게 극단의 매력이 넘쳤다.
*Sri Pada란 스리랑카 싱할라어로 위대한 발자국이라는 뜻으로, 이 산의 꼭대기에 움푹 패인 발자국 모양이 있어 이름붙여졌다. 재미있는 것은, 이 발자국을 불교에서는 부처가 다녀간 흔적이라 하고, 힌두교에서는 시바신,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는 아담이 지상에 딛은 첫 발자국이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하여 이 곳은 불교,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의 성지가 되었다. 스리랑카인은 일생에 한번은 오른다고 한다.
스리파다를 오르기 전날 이른 오후에 등반객 혹은 순례자로 북적대는 델하우시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숙소 앞에서 유난히 뾰족한 스리파다 산이 보인다. 뾰족한 만큼 가파른 계단 5,500개를 올라야 한다고 한다. 살짝 긴장되는 가운데 둘러보니, 나같은 외국인 여행자도 많지만, 현지인이 훨씬 많다. 게다가 스리랑카에서의 며칠 동안 통 보기 힘들었던 한국 여행자들도 한꺼번에 만났다. 며칠만의 한국어 수다가 즐거웠지만, 다음날 성공적인 등반을 빌며 이른 저녁에 헤어졌다.
일출을 보려면 새벽 2시에 출발해야 한다. 일찍 잠에 들었지만 12시에 깨버렸다. 두 시간을 멀뚱하게 있다가 나섰다. 캄캄했지만 사람들의 행렬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5,500개의 계단. 차근차근 오르면 되겠지, 했다. 그런데 이 계단의 각도와 높이가 갈수록 가팔라진다. 나중엔 계단 하나가 내 무릎보다 높았고 발 닿는 면은 내 발보다 좁았다. 한 계단 한 계단이 위기였다. 손으로 난간을 힘껏 잡아당겨 그 반동을 이용해서 몸을 끌어올리듯 하나하나 올라갔다. 한참을 가도 아득한 계단만 보였다.
‘한 계단, 한 계단 가다보면 끝이 보일 거야’
‘1.2.3.4.5.6.7.8.9.10. 1.2.3.4.5...’
‘이런 것이 불교의 고행일까?’
‘인생이란 하나 하나 힘든 순간을 거쳐 가는 것인가’
‘내가 지금껏 집착했던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었나, 그런 것들 다 이런 계단 하나에 불과한 것을’
‘뭔가 큰 걸 이루고 싶다는 건 핑계였을 뿐...그런게 중요한 게 아니야. 한계단 한계단 오르고 있느냐가 중요한 거지’
‘10까지 세고 쉬자’
‘10이 안되도 쉬어도 괜찮아. 포기만 않는다면’
‘하나 둘, 하나 둘.’(1, 2, 3, 4 세던 것이 하나둘로 바뀜)
‘헉헉…’
-2016년 1월 6일 일기장에서 발췌. 아마도 욕은 생략했을 것이다.
...나와의 싸움이 이런 것일까? 일기장을 보면 당시 허벅지가 터지는 와중에 머리 속에서는 별생각을 다 하며 고통을 잊어보려 했던 것 같다. 지금 보니 웃기지만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구나, 싶다. 그렇게 온 몸과 마음을 써가며 오르고 오르니 3시간은 흘러있었고 드디어 마지막 계단이 내 앞에 나타났다.
정상엔 빼곡하게, 정말 빼곡하게!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운 좋게 계단 꼭대기 좋은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그때부터, 땀 뻘뻘 흘리며 올랐건만 급격히 추위가 느껴졌고, 오돌오돌 떨면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어스름한 빛이 비치기 시작했지만 안개와 구름이 자욱했다. 시간이 갈수록 오늘은 일출을 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 점점 사람들의 표정에 실망의 기색이 어린다. 안돼!!! 이렇게 X고생을 하고 올라왔는데!!!!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완연히 밝아졌고, 슬슬 내려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 억울함 때문에 꿋꿋이 기다렸다. 추위와 싸우며 포기를 살짝 생각하는 순간, 구름 사이로 태양의 날카로운 빛이 내 동공을 찔렀다. 주변이 밝아지면서 이 뾰족한 성지의 진가가 시작되었다. 360도 막힘 없이 아름다운 산의 풍광이 펼쳐진다. 일출의 장관은 순간이었다. 불과 몇십분 전엔 온몸이 떨리도록 추웠는데, 태양이 비추기 시작하니 서늘한 기운은 금새 자취를 감춘다. 현지인들의 기도와 노래가 스리파다에 울린다. 다들 진지한 표정이다.
그렇게 내려가려던 순간, 밝은 해가 비치는 걸 보니 그 유명한 ‘산 그림자’가 생각났다. 일출 때 해가 정면으로 비추면 그 반대편으로 이 뾰족한 산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고 했다. 해가 뜰 때 구름이 많아 기대하지 않았지만, 지금이면 왠지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려가는 길에 만난 한국인 일행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다시 계단을 올라 반대편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사진으로 봤던 정삼각형 모양의 스리파다 그림자가 비현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탄성을 자아내는 장면!
모두의 성지라는 이 산에서 내가 바란 건 딱 이 그림이었다. 원하던 걸 이루게 해주는 산,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캄캄한 오르막과는 딴판으로 내려오는 길은 광활한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다리 풀린 것도 모르고 넋 놓고 보느라 하마터면 그 위험천만 계단 위를 굴러 내려올 뻔했다. 그렇게 내가 올랐던 가장 다이나믹한 산, 스리파다를 무사히 내려왔다.
미리 알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길, 하지만 일생에 한번은 봤어야 할 것 같은 기적 같은 광경- 스리파다에서의 그 간극이 여전히 아찔하다. 어쩌면 세상에 있다는 기적이란 그런 간극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내가 케이블카를 타고 스리파다를 올랐더라면 그런 감정을 느낄수 없었을 것이다. 기적도 행복도 결국 내가 만든 셈이다.
아, 그러고보니- 이 섬의 옛이름이 세렌디피티(뜻밖의 행복)의 어원이라고 한다. 참 그럴 듯 하다!
휴가로 갈만한 걷기여행
03 중국 차마고도(2) 호도협트레킹 ‘감칠맛나는 길, 차마고도’
04 스리랑카(1) 스리파다(아담스픽) ‘스리파다, Serendipity’
06 스리랑카(3) 호튼플레인즈 ‘교향곡을 즐기듯 걷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