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로 갈만한 걷기여행(5)
스리랑카 여행 전반에는 유적들과 스리파다(아담스픽)와 같은 빡센 곳들을 마스터한 후, 후반에는 쉬엄쉬엄 즐겨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스리파다에서 내려온 후 바로 간 곳은 차밭이 펼쳐진 곳, 하퓨탈레였다.
하퓨탈레로 가는 특급열차
기차를 타고 산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차창밖으로 차밭이 펼쳐져있는데, 과연 소문대로다. 엄청 큰 보성 차밭을 기차로 지나가는 기분이랄까? 겨우 3달러에 이런 특급열차급의 풍경이라니!
스리랑카는 한때 세계 50%의 커피를 생산할만큼 중요한 커피산지였는데, 1869년 커피녹병으로 커피나무가 전멸한 이후 차나무를 심게되었다고 한다. 이런 풍경이 채 150년 안에 만들어진 풍경이라니. 이렇게 빼곡이 나무들이 다시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이 필요했을까. 이 곳은 아름다운 자연풍광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치열한 일터이기도 하다.
하퓨탈레는 그 아기자기한 이름과는 달리, 호텔이 좀 있다는 것 외엔 그냥 보통 마을에 가까웠다. 여행자들은 차밭이 보이는 호텔에 묵으며 차밭풍경을 누리는 것이 할일의 전부다. 하퓨탈레 언덕 위 차밭이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작은 호텔에 방을 얻었다. 아, 이제야 좀 휴가같다.
스리파다에서 일출을 보았으니 다시는 아침 일찍 일어날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난 대체 왜 또 새벽택시를 타고 있는 것일까? 일출때의 차밭의 풍경을 보라는 추천을 저버릴수 없었던 여행자의 운명...! 일출코스가 유독 많은 스리랑카에서 졸지에 아침형인간이 되어버렸다.
립톤의 의자에서 시크릿가든으로
일출 포인트로 추천하는 이 언덕은 유명한 차브랜드의 창립자인 립톤경이 차밭 풍경을 보며 차를 마셨다 하여 Lipton’s seat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감탄했던 그 풍광은 나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한데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람에 제대로된 일출은 보지 못하고 립톤 할아버지 동상옆에서 사진 찍는데 만족해야 했다.
립톤싯에서 천천히 걸어 하퓨탈레로 내려가는 길은 짧은 걷기여행 코스다. 차밭을 걸으며 즐기는 것은 물론, 중간에 홍차 공장도 둘러볼 수 있다. 홍차향기 가득한 공장을 둘러보고, 손엔 홍차 제품을 비닐봉투에 담아 나왔다.
공장에서 나올때쯤 조금씩 날이 맑아졌지만 여전히 안개로 흐릿하다. 날씨가 더 맑았더라면 일출도, 탁 펼쳐진 차밭도 볼 수 있었을 것이지만, 안개낀 차밭에 있는 것도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인스타그램 Reyer 필터를 끼운듯 감성이 배가된달까. 허리춤까지 오는 나무들이 끝없이 펼쳐진 가운데 차나무에 기생하는 것인지 도움을 주는 것인지 모를 길쭉한 나무가 군데군데 있는 차밭 모양은 어제와 같다. 하지만 흐릿한 공기의 질감 차이로 전혀 다른 공간에 온 듯 하다. 내 사진을 잘 안찍는 편인데 왠일인지 차밭사이에 들어가 사진도 찍어보기도 하고, 일기장에 붙일 차잎 한두개쯤 남몰래 뜯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차밭에서 차를 따고 있는 여자 일꾼들이 꽤 보인다. 무례하게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웃으며 좋아했다. 이 곳이 누군가의 일터라는 것을 상기하고는 좀 차분해져서 걸어내려간다.
이런 풍경에 자기의 이름을 홀랑 붙이는 호사를 누리다니. 이 풍경을 만든 건 스리랑카의 농부들인데. 괜히 한 옛날 부자 할배가 누린 것들에 심통이 난다. 뭔가 스리랑카적인 이름을 붙여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한지 불과 몇시간 후, 하퓨탈레까지 내려와 호텔 근처 산책로에 풍경이 꽤나 맘에 든 나머지...걸터앉은 돌에다 이렇게 썼다.
Myosil’s seat.
...난 그냥 그 부자할배가 부러웠던 걸까?
나같은 여행자가 이름을 붙이건, 차밭 옛주인 할배가 유명하건 말건, 스리랑카의 그 아름다운 차밭 풍경의 주인은 그 맑게 웃던 농부들일 것이다.
누군가가 아름답게 가꾼 비밀스런 정원을 몰래 거닐다 나온 기분이다.
휴가로 갈만한 걷기여행
03 중국 차마고도(2) 호도협트레킹 ‘감칠맛나는 길, 차마고도’
04 스리랑카(1) 스리파다(아담스픽) ‘스리파다, Serendipity’
06 스리랑카(3) 호튼플레인즈 ‘교향곡을 즐기듯 걷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