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세가지 질문 #10. 오세민
[온더레코드 x 틴스토리] 는 씨프로그램이 만나 온 청소년들의 이야기입니다. '다음 세대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투자해 오는 동안, 프로젝트에 함께한 친구들의 생각도 함께 자랐습니다. 어떤 순간, 어떤 결정들이 쌓여 의미있는 경험으로 남는지, 청소년들이 어떤 궤도를 그리며 성장하는지, 프로젝트와 상관없이 긴 호흡으로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씨프로그램이 지난 3년간 만난 청소년 5500명 중 10명의 청소년에게 6개월 마다 같은 3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따라가는 긴 여정입니다. 10주 동안 10명의 Teen Story를 전해드립니다.
정세청세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라는 이름으로 청소년들이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는 인문 토론의 장입니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전국에서 2만 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자유, 정의, 책임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2017년의 주제는 “일상의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10가지 기술”을 주제로 ‘귀 기울여 듣기’부터 ‘선택하기’까지 6번의 토론을 했습니다. 세민이는 울산 기획팀원으로 2년째 활동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바쁠 고3 생활 중에도 정세청세에 참여하게 만드는 동력은 무엇일까요?
가장 최근에 문이과를 결정하던 때가 떠오르는데, 아버지는 이과를 나오셨지만 저는 문과를 택했어요. 문이과 결정 2주 전에 아버지가 ‘남자애들은 이과를 가야 취업도 유리하지 않겠냐’고 권유해주셨는데, 고민이 되더라고요. 단지 수학이 싫어서 포기하는 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역사와 사회를 좋아했으니까 좋아하는 분야를 계속 살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좋아하고 내가 남한테 어떤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가 중요했기 때문에 머릿속에,
내가 이 선택을 하면
남한테 어떤 영향을 미치고,
나한테는 어떤 영향이 있을까?
라는 제일 큰 기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문과를 가면 무슨 학과를 갈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처음에는 법조계가 떠올랐어요. 로스쿨에 진학해서 저작권 관련 전문가가 되는 모습도 그려보고, 그 때 법원 시민 참여단으로 참여하면서 방학동안 재판 참관도 가보고 그랬거든요. 사회학이나 언론계열도 염두에 두고 있었고요.
반대로 이과를 가면 무슨 학과를 갈까 생각해봤을 때 생명공학과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여길 가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는 모습이 상상됐는데, 이걸 다 적어놓고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기본적으로 남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이과와 상관없이 깔려있더라고요. 그리고 집에서 혼자 이것 저것 만들어 보고 책읽는 걸 좋아하는 만큼이나 남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즐거워서, 사람을 대하는 일과 물건을 대하는 일 중에 뭐가 더 잘 맞을까 고민하기도 했고요. 결국 사람의 마음을 만져주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다고 결론을 내리고 문과를 택했어요.
이과에 가서 의사가 되면 마음을 만져주지 못한다는 건 아닌데, 제 단점이 책임감이 그렇게 크지 않아서 의사가 되는 건 힘들겠다고 싶었어요. 남들이 보는 의사는 휘황찬란하고 멋진 직업이지만 외과 의사이신 제 친구 아버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명절에 시골에 내려갔다가도 긴급 수술이 있으면 바로 병원에 출근하셔야 한다 그러더라고요. 정말 사명감없이 돈만 바라고 그 정도의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자문했을 때 이과가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과에 가서 법조인이 된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상상할 때 영화 <변호인>을 많이 생각했어요. 그 때 마침 사회 선생님께서 읽고 계시던 책도 <소수의견>이었는데, 읽으면서 ‘과연 내가 돈을 보지 않고 사람들을 잘 도와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10년지기 친구에게 제 진로에 대한 이런 저런 고민들을 털어놓고 제가 뭘 하면 좋을지 물어봤더니,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만져주는 일이 너한테 잘 맞는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마침 또 인문논술대회에서 1등을 해서 아버지가 ‘너는 문과에도 소질이 있는 거 같다’고 하시기도 했고요.
제일 결정적이었던 건,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예요.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이유가 궁금했고, 왜 도박이 안 좋은 걸 알면서도 계속 하는걸까같은 생각을 어릴 때부터 많이 했어요. 사람이 뭔지 궁금한 호기심, 좀 더 배우고 싶은 것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궁극적으로 문과를 택해서 공부하고 있어요.
Q. 만약 아버지가 계속 이과를 고집하시고 세민이는 문과를 가고 싶어서 뜻이 모아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결정했을 것 같아요?
그랬다면 제 생각대로 문과를 선택했을 것 같아요. 그 때 가치관에 대해서 부모님과 이야기를 엄청 많이 했었어요. 아버지께서 부모로서 자식의 미래가 걱정되서 조언해 주시는 건 이해하지만, 제 미래는 제가 책임지는 거니까 경제적으로 조금 어렵더라도 하고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씀드렸거든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근근이 밥벌이를 하는 게 좋은지, 우울하지만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게 좋은지’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었을 때 아버지께서 ‘너도 언젠가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때가 올 거고, 살다 보면 경제적인 여건을 무시할 수 없으니 이과로 진학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계속 잘 생각해 보라고 하셨지만, 결국 제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면서 문과를 선택했을 것 같아요.
Q. 앞으로의 공부에 대해 어떤 선택지를 생각하고 있어요?
일단 4년제 대학은 가고 싶은데 내신 성적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서 논술로 6개 대학에 수시 전형으로 지원하려고 해요. 나중에 독일로 유학가서 석박사 과정을 밟는 것도 생각은 하고 있지만 아직 먼 미래니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저는 밖에 나가서 뛰어노는 건 별로 안 좋아해요. 남자애들 다 축구장에서 뛰어놀 때 방에서 말이 통하는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나누거나 같이 책읽고 그랬어요. 어릴 때부터 집에서 아버지가 책읽는 모습을 본 영향이 되게 컸던 거 같아요.
할머니께서 국어 선생님이셨어요. 책 좋아하시는 할머니덕분에 아버지도 책을 정말 좋아하셔서 거실에 TV 대신 책장에 책만 가득했거든요. 제 방뿐만 아니라 집안 곳곳에 책이 비치되어 있고, 아버지는 식사하면서 책을 읽는 게 습관이실 정도에요. 할머니와 아버지가 집에 책읽는 분위기를 딱 잡아주시니까 저도 어릴 때는 잘 안 읽었는데 지금은 독서가 몸에 배었어요.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역사를 좋아하셔서 집에 있는 책 중에 80%가 역사 관련 도서였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쉽게 손에 잡히는 역사 만화책같은 걸 보다가 자연스럽게 줄글도 읽게 되었고요.
최근에 옮긴 교회 목사님께서 제가 교회에서 책읽는 모습을 보시고는 ‘네가 책을 많이 읽으니까, 인문학 고전도 한 번 읽어보면 어떠니’ 하시면서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라는 책을 추천해 주시더라고요. 그 추천을 계기로 최근 3년간 플라톤의 ‘국가’같은 책도 찾아보면서 인문학에 관심이 많아지고 생각의 폭도 많이 늘어난 거 같아요.
나중에 목사님께 왜 그 책을 추천해 주셨냐고 여쭤봤더니, 인문학이 사람을 똑똑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이 부각되어 있지만 그보다는 인문학이 그만큼 힘이 있다는 걸 느끼고 스스로 찾아 읽게 되길 바랐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천재가 되어야겠다라기보다는 제 생각을 얼마나 넓힐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읽었어요. <리딩으로 리드하라>에 나이별, 학년별로 추천된 도서 목록을 따라 읽지 않고 제가 읽고싶은 걸 골라 읽었고, 사회 선생님께도 추천받아서 글쓰기 동아리 친구들이랑 같이 읽기도 했어요. 그 친구들이랑 1, 2학년 때 저희가 영화, 책을 보고 쓴 칼럼을 모아서 책도 2권냈어요.
정세청세를 할 때 경청의 태도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대하는 기술도 많이 배웠어요. 정말 다양한 참여자들이 있는데, 기획팀원으로서 최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분들이 어색하지 않게 어떻게든 계속 말이 이어지게 노력하거든요.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정세청세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싸우면 항상 저를 불러요. 그러면 저는 갈등조정 중재하는 것처럼 둘 다 진정시키고 일단 이야기를 다 들어봐요. 그리고 나서 각자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을 던져줘요. 그러면 애들이 알아서 생각해보고 본인이 어느 부분에서 잘못 생각했는지 깨닫더라고요. 그리고 경어를 사용해서 정중하게 말하는 것도 많이 늘었어요. 국어 선생님께서 어투가 착하고 바르다는 칭찬을 해주시더라고요.
또 하나는 인문학을 읽기 시작한지 3년쯤 됐는데, 처음에는 솔직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플라톤의 국가라는 게 멋져 보이긴 했는데 도통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이걸 내가 왜 읽고 있지’하는 생각도 들었고. 읽으면서 그 순간에 파바박 느낌이 온다기보다는, 그 때 의무감에 읽었던 것들이 나중에 어떤 질문을 받거나 ‘관점’같은 키워드가 주어졌을 때 퍼즐 조각 맞춰지듯이 사회를 보는 시야가 커지는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왜 인문 고전이 살아남았는지 알 거 같아요. 저도 모르게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와서 토론 대회 같은 때에도 나오더라고요. 책 자체보다는 2000년도 넘는 과거에 이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왜’ 했을까 이유를 고민하면서 사유가 깊어지고, 생각하는 능력이 키워진 거 같아요. 이제는 노래들으면서 걸을 때 그냥 아무 생각없이 걷는 게 아니라, 예전에 읽었던 책이나 요즘 읽는 책들에 대해서 무의식 중에 생각하기도 하고요.
Q. 정세청세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사회 선생님께서 추천해 주신 책을 읽은 게 계기가 되었어요. 학교에서 <내 이름은 공동체입니다> 책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이 있었거든요. 이 책 마지막 부분에 인디고 서원이 나오는데, 선생님께서 ‘울산에서 비교적 가까운 부산에 서점이 있으니까 한 번 가보는 것도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당시 제가 대한민국 청소년 기자단 활동을 하고 있어서, 취재 겸 한 번 가보자 싶어서 인터뷰를 하러 갔어요. 그 때 유진재 정세청세 팀장님을 만나서 청소년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야하는가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고, 인터뷰 말미에 저한테 정세청세 울산 기획팀을 해보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울산 팀은 울산외고 팀원들이 많아서 외부 팀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그 때부터 합류하게 되었어요.
Q. 말로만 듣던 정세청세, 직접 해보니 어땠어요?
처음에는 정세청세를 책으로 접하고 ‘이런 곳이 있구나’ 정도였는데, 생각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친구들과 인문학적 이야기를 다룬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한편으로는 이렇게 큰 행사를 제가 직접 기획하고 실행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어요. 근데 전년도 팀장인 친구가 많이 고생하면서 팀원들을 잘 이끌어주고, 팀원들도 잘 도와줘서 기대 이상으로 잘 해오던 팀에 합류했기 때문에 기획팀을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행사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아서 깜짝 놀랐어요. 처음에는 ‘요즘 청소년들이 무슨 인문학이야’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왜냐하면 학교에서 토론 수업을 할 때 활발하게 참여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거든요. 자발적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죠. 그런데 울산팀/ 부산팀 정청 행사를 갔더니 엄마가 추천해서 왔다고 하는 분들조차도 흥미로운 인문학적 포인트를 짚어내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 가시더라고요. 제가 철학을 좋아해서 토론할 때 읽었던 철학 책에 대해 언급할 때가 있는데, 그 때 자기도 그 책을 읽어봤다고 하면서 깊이있는 대화로 이어질 때도 있어요. 기본적으로 인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있으니까 오는 분들이겠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 안에 얼마나 깊이 들어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좋은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Q. 정세청세를 하면서 기대와 달랐던 점이 있었어요?
약간 실망스러웠던 부분은 정세청세가 나름대로 정의를 중요시하는 청소년들이 이야기하는 공간인데 서로 피드백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어요. 울산 팀이 같은 학교 선후배가 많은 특성상 서로에 대한 피드백이 별로 없었고, 다른 지역들과의 연계성도 떨어졌던 거 같아요. 올해 초 인문학 캠프에서 정세청세 총괄기획팀원 분들과 진재 팀장님이 이런 부분을 딱 집어서 하나씩 설명해주셨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피드백을 주고받는 부분이 확실히 더 나아졌다고 느껴요.
정세청세를 6년째 하고 있는 부산팀 친구랑 한 번 이야기한 적 있는데, 그 친구가 ‘정청은 가끔 보면 잘못된 배려를 하고 있는 거 같다’는 말을 한 게 와닿았거든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태도는 좋지만, 기본적으로 기획팀원이 해야 할 일은 참여자들이 인문학에 대해 풍부하게 이야기나누는 경험을 할 수 있게 행사를 이끌어 가야 하는 거잖아요. 단지 팀원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제대로 피드백을 하지 않는 건 오히려 더 독이라는 이야길했었어요.
Q. 벌써 2년동안 정청을 해왔는데, 가장 큰 변화가 뭐라고 생각해요?
예전보다 사고력이 많이 늘었다는 말도 들었고, 10년지기 친구가 저한테 어투나 듣는 자세가 많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작년 정세청세 주제가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10가지 기술’이었는데, 그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와닿은 걸 뽑으라고 했을 때 ‘귀 기울여 듣기’를 뽑았어요. 제가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경청’의 자세가 좀 부족했거든요. 그런데 정세청세를 할 때는 기획팀원이니까 조장으로 들어가서 토론을 이끌어야 해요. 조장은 생각해 보면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안 끊기게 도와주는 어시스트 역할이거든요. ‘듣는 게 배우는 거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걸 정청하면서 정말 많이 느꼈어요.
제 좌우명이예요. 대책없는 긍정은 안되겠지만, 사람이 우울한 것보다는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를 유지하는 게 타인과의 갈등도 줄이고, 일을 하는데 훨씬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좀 긍정적으로 살자는 생각을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어요.
세민이는 귀 기울여 듣기를 실천하면서 친구들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마다 ‘중재자’로 불려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커서 인문 고전을 읽고, 사람들의 마음을 만져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문과를 선택했던 세민이에게 잘 어울리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호기심을 따라 꾸준히 책읽고 토론하는 세민이가 수능을 앞두고 어떤 생각으로 다음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 새삼 궁금해집니다. 6개월 뒤 미래에서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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