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세가지 질문 #09. 박세은
[온더레코드 x 틴스토리] 는 씨프로그램이 만나 온 청소년들의 이야기입니다. '다음 세대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투자해 오는 동안, 프로젝트에 함께한 친구들의 생각도 함께 자랐습니다. 어떤 순간, 어떤 결정들이 쌓여 의미있는 경험으로 남는지, 청소년들이 어떤 궤도를 그리며 성장하는지, 프로젝트와 상관없이 긴 호흡으로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씨프로그램이 지난 3년간 만난 청소년 5500명 중 10명의 청소년에게 6개월 마다 같은 3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따라가는 긴 여정입니다. 10주 동안 10명의 Teen Story를 전해드립니다.
부산에 있는 세은이와 스카이프로 이야기나누는 동안 방문이 두어 차례 열렸다 닫혔습니다. 엄마가 뭐하냐고 물어볼 때마다 “정세청세 회의 중”이라고 얼버무리는 상황이 꽤 익숙해 보였습니다. 정세청세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라는 이름으로, 청소년들이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는 인문 토론의 장입니다. 2017년까지 전국 28개 지역에서 2만 명 넘는 청소년들이 참여해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 같은 큰 질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공부하기만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 정세청세 활동에 몰두하는 세은이, 왜 이렇게 열심일까요?
Q. 세은이는 정세청세를 '사는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대로 살 수 있게 해주는 곳'이라고 말했어요. 어떤 곳인지 더 이야기 해주세요.
정세청세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의 줄임말이예요. 청소년들이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는 토론 모임이죠. 2007년 인디고 서원에서 시작했어요.
사실 작년에 부산 기획팀장을 하면서 많이 힘들어서 계속 해야 되나 고민할 때가 있었거든요. 학교 공부와 정세청세 공부를 병행하면서 부모님과의 갈등이 있었어요. 제가 잘 하고 싶어서 욕심이 나니까 지치더라고요. 근데 그 고비를 딱 넘기고 나서 다시 보니 정세청세가 제가 생각을 더 깊게 하도록 해주는 곳이자, 사는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대로 살 수 있게 해주는 곳이라는 걸 진짜 뼈저리게 느꼈어요. 기획팀으로써 정기적으로 인문학 공부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1년에 6번씩 행사를 기획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우리가 공부한 내용을 전달한다는 것도 좋아요. 저에게 정세청세는 내 삶의 중심을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해주는 곳이에요.
내 삶의 중심을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해주는 곳
Q. 정세청세를 왜 시작하게 됐나요?
원래 중학교 때 자신감도 많고, 공부 잘 하는 학생으로 인정받았어요. 학생회장하면서 친구들이랑 교칙도 만들고 프로젝트도 많이 하는 외향적인 아이였는데, 국제고에 떨어지고 나서 자신감이 떨어졌어요.
그러다 중 3 1학기 즈음에 정세청세에 처음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 때는 중학교 공부와 고등학교 공부가 그렇게 다른 줄 모르고, 고등학생들이랑 같은 조에서 이야기할 때 ‘왜 그렇게 공부를 힘들어하지? 나는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되게 재밌는데’라고 생각했었어요.
믹싱 제가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친한 친구들이랑 다 다른 학교에 배정받고 새로운 친구들이랑 중학교 때와 너무 다른 공부를 하니까 힘들더라고요. 고1 성적표받고 모의고사를 치다 보니까 공부에 자신감이 많이 떨어지는 거에요. 그러면서 정세청세에 시간을 더 많이 쏟아부었어요.
인문계 학교 자체가 대학을 보내기 위한 곳이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계속 성적, 성적, 성적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 환경에서 제가 뭘 하고 싶다는 꿈을 잊고, ‘시험’이라는 그 틀 속에서만 뱅글뱅글 돌게 되더라고요. 오히려 정세청세처럼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면서 세상을 바꿔 나갈 수 있는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건 생활기록부에 적을 만한 꿈이 아닌거죠. 그런 것 때문에 괴리를 많이 느꼈어요.
정세청세던 공부던 하다보니까 ‘1등을 해야되겠다’가 아니라, ‘내 앞에 주어진 걸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두가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 중이에요.
Q. 정세청세를 하고 뭐가 제일 많이 바뀌었다고 느껴요?
내면이 많이 바뀐 거 같아요. 단단해진 것도 있고, 정세청세를 하면서 쓰는 언어와 생각하는 언어들이 바뀌었어요. 전에는 별 생각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썼던 말들이 지금은 불편하게 느껴지고, 그런 부분에 대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게 큰 변화라고 느껴요.
지금의 저를 만든 건 수많은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앞에서는 정세청세에 대해서만 주로 이야기를 했지만, 솔직히 그 동안 제가 해온 활동들을 다 말하라고 하면 기억이 잘 안 날 정도로 다양하게 해왔어요. 그 과정에서 조금씩 얻은 깨달음들을 정세청세를 주체적으로 하면서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활동 하나를 꼽자면 중1 여름방학 때 엄마가 아이비리그 투어를 보내주셔서 2주 정도 다녀온 거예요. 솔직히 제가 그 때 공부를 안 했거든요. 엄마가 미국에서 재밌게 놀다 오라고해서 갔다 온 건데, 거기서 세상이 진짜 크다는 걸 느꼈어요. 한국은 인구 밀도가 높아서 아파트도 다닥다닥 붙어있고 좀 답답하잖아요. 그런데 미국은 땅도 넓고 사는 모습 자체가 다르니까 한 번의 여행이었지만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준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거기서 친해진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기도 했지만 갈등이 있어서 싸움도 많았거든요. 그 과정에서 배운 것도 많았고요.
중3 때 국제고를 가려고 했으니까 저는 당연히 제가 문과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어딜가든 일단 주어지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과학도 배우고 싶어서 고1 2학기 말에 이과를 선택했어요. 인문학은 정세청세도 있고 독학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과학은 문과생들이 혼자 배우기 힘든 부분이잖아요. 그래서 지금 과학 공부를 하고 있는데 문과랑 차이가 많은 거 같아요.
당연하게 문과갈거라 생각하다가 마지막에 이과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정세청세에서 본 다큐멘터리 영향도 있었어요. 올해 정세청세 인문학 캠프에 갔을 때, <벤딩디아크 (Bending the arc)>라는 다큐멘터리를 같이 봤는데, 그 때 의대생 폴 파머랑 김용이 어떻게 비영리 조직을 만들어서 생명을 구하는지 봤거든요. 그 영화에서 김용 아버지가 아들한테
기술이 있어야 세계 어딜 가든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게 와닿았어요. 그 때 ‘나만의 기술’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이과를 선택하는 이유가 됐어요.
제가 중3 때 교내 자치활동하면서 만난 담당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진짜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 당시에 제가 1살 어린 여동생 걱정을 많이 했었거든요. 동생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제가 해결해야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그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한 번 이야기하자고 하시더라고요. 그 때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나라는 맏이와 동생을 차별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너도 동생도 함께 성장하고 있는 청소년이다. 동생을 책임지는건 네 임무가 아니다”라는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동생과 저를 상하 관계나 일방적인 돌봄이 필요한 관계가 아니라 같이 성장하는 관계로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셔서 그 때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계기가 됐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제가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과 주변 사람들을 챙겨야 한다는 압박을 받아서 제 자신보다 남을 많이 신경쓰면서 스스로를 괴롭혔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시간을 더 할애하게 되었고요.
그리고 저는 글을 쓸 때 스스로 채워진다고 느껴요. 어릴 때부터 글을 읽는 건 별로 안 좋아했어요. 뭔가를 읽어서 배우는 것보다 직접 해보는 걸 더 좋아했거든요. 읽는 대신 쓰는 걸 훨씬 좋아했어요. 주제를 가지고 제 생각을 적는 걸 좋아해서, 글을 쓸 때마다 저를 채워나가는 느낌이었어요.
Q. 일기도 쓰나요?
일기는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쓰라고 하실 때는 안 썼는데, 고등학교 들어와서 재작년 말부터 쓰고싶을 때 써요. 1년에 공책 1권 정도 써요. 누가 시키는 건 잘 안 하고 제가 하고싶을 때 하는 편이에요.
Q.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나요?
중학교 때는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중요한 소식을 알려 주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에 올라오니까 할 수 있는 활동이 많아지잖아요. 부산국제광고제 활동을 하면서 광고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고 어쨌든 계속 바뀌긴 했는데, 매체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쭉 있었어요. 작년에 제출한 희망 직업 칸에는 공익광고 기획자랑 사회적 기업 CEO를 적었어요. 제가 적은게 저랑 잘 맞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하고 싶은 건 CEO에요. 중3 때 창업에 관심이 생겨 부산 창업카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제 생각을 실현할 수 있는 창업을 하고 싶어졌어요. 뭘로 창업을 할진 잘 모르겠지만 제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문과 영감을 줬으면 좋겠어요.
부모님께서는 뭘 하든 제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건 좋은데, 대신 밥은 먹고 사람답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세요. 밥벌이되는 직업을 가지려면 대학교는 가야된다고 하시고요. 작년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학원 빼가면서 인디고 서원 수업에 가서 마음에 안 들어하셨고, 정세청세를 할 땐 저희끼리 스카이프 회의를 밤 12시까지 할 때도 있으니까 ‘공부 안하고 뭐 하냐’ 하실 때도 많아요. 성적표가 나왔을 때 부모님께 말 걸기 미안하긴 하지만, 인디고 서원 활동이나 제가 하고싶은 활동을 병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하지 마라’하시지는 않아요. 저를 믿어 주시고 제 의견을 존중해주시는 것 같아요.
Q. 좌우명이 있나요?
제가 작년까지 밀고 있던 건 ‘Carpe Diem’ 이었어요. ‘이 순간을 즐겨라,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얼마 전에 여동생이랑 같이 코코(Coco)라는 영화를 보는데 영화 음악이 진짜 좋은 거에요. 그 영화에 ‘Remember Me’ 라는 노래가 나오는데, 동생이 영화 끝나고 나서 자기 좌우명을 이제 Remember Me로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를 누군가가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누군가 저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세은이에게 정세청세는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조금씩 쌓아온 깨달음들을 뿜어내는 곳이자, 사는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대로 살 수 있도록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난다고 해요. 정세청세의 기반이 되는 인디고 서원은 부산의 유명 학원가 한가운데 자리잡은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입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도덕적 품성·비판적 지성·예술적 감성을 함양한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공부의 목적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세은이의 생각은 6개월 뒤 얼마나 자라있을까요? 미래에서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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