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무튼 서태지 9- 세계속의 서태지(?)

서태지는 왜 10집을 내지 않는가 챕터 204

by 지현

90년대에 서태지가 음악을 하던 시대에는 Kpop이 없었다. 빌보드도 그래미 상도 저 먼나라 별세계의 일이었고 수준이 높은 선진국의 음악과, 우리만 즐기던 한국 내의 음악에는 커다란 경계선이 있었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타고 봉준호가 아카데미상을 타며 BTS가 빌보드에 오르는 것을 보며 자라는 세대는 나같은 사람의, 세상의 변방에서 쭈그리고 있다는 감각, 뒤쳐져 있다는 촌스러운 한계성을 잘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90년대에 한국이 아닌 곳에서 학교를 잠깐 다니면서 젊은 아이들, 음악하는 아이들과도 교류가 있었는데 한 친구가 네가 듣는 음악을 들려달라고 했었다. 가사를 못 알아듣는데 어쩌려고 하나 하면서 이승환이었나? 아무 음악을 들려주었는데 그가 녹음의 수준과 악기 구성을 주의해서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해할 가사의 맥락이 없어도 음악을 들을 수가 있구나 하는 새로운 발견을 새삼스럽게 했다. 전반적으로 자랑할 게 없는 그 때 한국에서도 아니 이건 세계 스탠다드? 라고 생각하게 한 것들은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서태지의 음악이었다.


서태지는 정말 끊임없이 세계로 나아가라는 격려 그리고 압력을 받았다. 그가, 발해를 꿈꾸며가 들어 있는 3집의 음악을 미국에서 녹음한 이후로 그의 음악의 세계 시장 진출 가능성은 팬들에게는 희망이었다. 어쨌거나 세계적인 밴드들, 핑크 플로이드, 머틀리 크루 등의 음악을 듣고 자랐다고 말한 서태지 스스로 고등학교를 중퇴할 때 부모에게, 20대 초반에 국내에서 일인자가 되고 그 후에는 세계로 진출하겠다고 무릎꿇고 진지하게 포부를 밝혔다 한다. 4집 이후에 은퇴를 했을 때도 세계에 나가서 국제적은 수준의 음악을 배우고 익히고 있을거라고 설왕설래도 있었고 아무리 혼자 잘 나가도 밴드 없이, 국내에 락 씬 없이 혼자 세계 진출 가능하겠냐고 한국의 후진 수준(?)을 탓하는 훈장들도 서태지 팬사이트에는 넘쳐났다.


혼자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녹음에 녹음을 거듭하여 날려보낸 내향적인 5집 이후, 미국에 한참 유행하던 핌프락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거친 락음악의 세계를 확립한 그가 6집과 함게 강렬하게 돌아왔을 때, 팬들과 또 안티들의 서태지 세계진출 나팔은 가장 거세게 불어 젖혀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대경성, 탱크, 인터넷 전쟁, 오렌지들 수록곡의 녹음은 그당시 한국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강력한 사운드를 들려주는 녹음이었고 6집 밴드들은 국내 최정상급들을 몰래 미국에 초청하여 구성하였으며 드럼주자는 한국인이 아니었다. 콘Korn과도 림프비즈킷 Limp Bizkit과도 비슷하게 들린다며 표절 어쩌구 하며 망발을 일삼던 서태지 안티들은 서태지가 불러 내한 공연을 하던 그 아티스트들에게 6집을 들려주며 당신들의 음악과 비슷한가 아닌가 무례한 질문을 던지기까지 했었다. (근거 없는 안티들은 가끔 이렇게 치졸하다. 김대중 노벨 평화상을 취소하라고 스웨덴 한림원에 다량으로 편지를 보내던 수구꼴통들과 뭐가 다른가!) 하여튼 림프 비즈킷은 우리 음악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음악이며 독특하다고 하고 (안티들의 정성에 혀를 차는 의미 반을 섞어서) 엄지를 치켜들기까지 했으니 뭐, 이 일은 또 한번 안티들이 제 무덤을 판 일로 기억될 뿐이다.


안티들은 그렇다치고 팬들도 서태지에게 세계로 나가라고 격려했는데 그것은 반은 안타까움이었다. 언론이 안티로서 달려드는 한국 내에서는 그의 음악을 제대로 알아볼 평론가도 락씬도 없을 거같다는 안타까움. 음악이 운동경기였다면 박세리의 골프 메이저 리그 우승처럼 김연아의 올림픽 금메달처럼 수치로 환산하여 그의 음악에 영예의 훈장을 달아줄 수 있을텐데 그럴 수 없다는 가슴 아픔이 그 동력이었다. 우리 태지가 핍박받는 국내의 좁은 음악씬을 떠나 세계 시장에서 다른 명밴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보고 싶었고 서태지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ETP페스티발에서 정상급의 밴드들이 내한하면 이 경험이 그의 세계시장진출의 교두보가 되길 바라는 글들도 팬사이트에 줄을 이었다.


서태지도 세계 진출의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6집 활동 중에 일본의 서머소닉 록페스티발에 특권 없이 한 록그룹으로 겸허하게 참가하기도 했고 7집 활동 중에는 '경계를 넘어 큰 울림을 알리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공연을 하러 가기도 했다. (러시아가 전쟁을 하는 지금 상상할 수도 없는 평화로운 시대였다.. 하아.)

ba9be28a004a8cf28b1db8511bfdea43.jpg?ckattempt=1


하지만 서태지는 혼자 너무 앞서나간 파이오니아였다. 한국영화의 질적 양적 발전 없이 봉준호의 아카데미 수상이 있을 수 없듯이, Kpop의 엄청난 시장 확장성 없이 BTS등 한국 음악 그룹이 빌보드에 오를 가능성은 희박했듯이 서태지라는 아티스트 혼자의 힘으로 눈에 띄는 성과를 글로벌 무대에서 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국내에서 그의 위상도 변했고 안티들도 잠잠해졌고 팬들도 세계관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미 세계에서 통하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라고 아티스트들을 줄세우지 않는다. (쓸데없이) 세계로 나가라고 다른 곳에서 너의 가치를 증명해 보라고 하면서 밀어대지 않는다. 국내의 탑이 세계의 탑일 수도 있는 이 시대에는 그 전의 열등감 섞인, 세계적이어야 인정해주던 가치 체계가 수상하게 느껴진다.


서태지는 언제나 글로벌 음악의 수준을 따라가고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시도하는 음악가였고 필요할 경우에는 그것을 했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그저 자신의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아무튼 서태지-서태지는 왜 10집을 내지 않는가


1부: 서태지의 음악

102: 서태지의 자연사랑과 방랑벽 - 프리스타일, 모아이, 숲속의 파이터

103: 서태지의 반항과 비판의식 - 교실이데아, 틱탁, 시대유감

104: 서태지의 고유성, 지키기 위한 싸움 - 레플리카, 수시아

105: 서태지의 플라토닉 러브 - 줄리엣, 10월 4일, 영원

106: 서태지의 이성애적 사랑 - 버뮤다[트라이앵글]


2부: 서태지 이야기

201: 그가 이룬 것은...

202: 지극히 사적인,

203: 페미니스트 서태지

204: 세계속의 서태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무튼 서태지 8- 어른들의 모순적인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