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스패드를 사야하는데 자꾸 까먹어서 책을 받쳐놓고 몇 달 동안 쓰고 있다. 꼭 하고 싶은 커다란 일들은 바로바로 시작하는 것에 비해, 이런 사소한 일들은 가족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오랫동안 내버려 둘 때가 많다. 그러다가 그냥 적응해 버리기 일쑤. 원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받쳐 두었는데, 연결이 자주 끊겼다. 파란색이라 그런가 싶어 검은 색으로 바꾸려고 책장을 빠르게 스캔하던 중,
검은 색 책이면서 예쁜 책을 고르다보니 나온 책!
무려 십 년이 넘게 책장에만 있던 책. 표지를 보니 옛날 생각이 나 펼쳐 보니, 줄이 굉장히 많이 쳐져 있고 중간중간에 메모도 있다. 이 책을 읽던 장소와 그때의 내가 단번에 떠올랐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바로 삼키지 못하고 한참 동안 입 속에서 요리조리 굴려보는 쾌락에 깊이 빠져들던 시기였다. 쓰지 않고 읽기만 하던 때라 읽기가 더 달았다. 쓰고 싶다는 욕망 없이 그저 읽기만을 즐기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12년 전으로 나를 데려가 준 매혹적인 문장들 중 일부를 추렸다.
(저자 정혜윤이 꼽은 독서가들과의 인터뷰를 적어놓은 책이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책과 말과 문장이 인용되어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 중 누구와도 나 자신을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탈로 칼비노, '우주 만화'
그래서 독창성이란 건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다시 자기식으로 배치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어요.
-진중권
성장 소설에 매료되는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면, 쉽게 찾아온 것은 결코 우리의 일부분이 될 수 없어서라고 인정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생에서 어렵게 얻은 게 바로 우리일지 모른다는 것이 성장소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일지 모른다.
-정혜윤
'남들과 다르면 어떡하지?'와 '아냐, 사실은 나는 남들과 달라.' 이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했죠. 그래서 솔직하거나 당당하지 못했죠.
-정이현
우리의 영혼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비밀이다.
-파스칼 키냐르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타인에게도 일어나리라.'
-오스카 와일드, '옥중기'
나의 기쁨이 장식되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으며(중략) 입 맞추기 위해서 나는 입가에 남은 포도송이의 얼룩들을 씻지 않았다. 입을 맞추고 나서 나는 입술을 식힐 사이도 없이 달콤한 포두주를 마셨다.(중략)어떠한 기쁨도 미리 준비하지 말라.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곁에 선 이가 나와 꼭 닮은 영혼임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김탁환, '리심'
나는 다른 사람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단지 그 사람이 자기를 알리려고 하는 범위 내에서이다.
-폴 오스터, '고독의 발명'
지금 나는 이렇게 평범하지만 뭔가를 발견하면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나도 나만의 장미, 나만의 반지, 나만의 영지를 찾으면 진짜 멋져진다. 그걸 몰라서 이 모양 이 꼴이다.
-은희경
한 권의 책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밀란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책은 견디기 힘든 시간들을 지나게 해줘요.
-문소리
자네가 큰 조롱박을 세상일에 어두운 어린아이에게 주면 그 아이는 그것으로 물을 담거나 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반드시 그것을 물에 띄워놓고 가지고 놀 것이네. 왜냐하면 조롱박을 물을 담거나 뜨는 데 사용하는 것은 사람들이 발명한 것이지 결코 조롱박의 천성은 아니기 때문이네.
-'장자'
가장 심각한 비관주의자가 어쩌면 가장 철저한 낙관주의자일 수 있다.
-'장자'
인생의 상처를 견디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동정과 익살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쓸쓸함보다 더 큰 힘이 어디있으랴'
거짓말에 의지하는 진실이 가장 치명적인 진실이다.
-정혜윤
아름다움움을 연출하진 못해도 감지해내기라도 하는 게 우리 몫이 아닐까 싶다. 달리면서 어느 날 하루쯤 잠깐 자기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될 거다. 그리고 그때의 숨이 진짜 숨이다.
-정혜윤
거울과 성교는 사람의 수를 증식시키기 때문에 가증스러운 것이다.
-보르헤스
삶이 기다리는 것이라면 곁눈질하지 말고 기다리자.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의 일기'
나는 어떤 능력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현재 나에게 비쳐지는 그의 인상이다.(중략)재능이란 인격의 어느 한 측면에 불과하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의 일기'
내 안에 무언가를 사랑하려는 정신은 분명히 있다. 그래서 나는 모든 비난을 물리친다. 어떤 경우에든 나를 지켜주는 근거는 바로 사랑이다. 나의 사랑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이에 근거해서 나를 만나라. 그러면 나도 강한 사람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남이 나를 비난하거나 내가 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순간마다 나는 지체없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사랑하는 나의 정신에 의지하자.'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의 일기'
부끄럽지만 이런 허세스러운 글귀들도 적혀 있다.
오래된 과거를 떠올리면 내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좋아진 것도 있고 나빠진 것도 있고 좋고 나쁨으로 가를 수 없는 애매한 변화들도 있다. 대단히 열광했으나 시들해진 것과 큰 관심이 없었으나 애정으로 바라보게 된 것들. 가까웠으나 멀어진 존재들과 알지도 못했으나 가까이 와 있는 존재들. 매일이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나는 어떤 방향으로든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달라짐'을 의식하면 '어찌되었든 모든 것은 지나간다.'라는 생각에 관조적이어지기도 하지만, '영원한 건 절대 없다.'라는 생각에 허망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기만 할까. 오래된 책 속에 줄쳐진 문장들을 보니 생각이 좀 달라진다. 12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는 그 때와 똑같이 이 문장들에 마음이 흔들린다. 거듭 고개를 끄덕이며 변하지 않은 나를 실감했다. 격변하는 시간을 관통하며 아주 오랫동안 나의 내면을 지탱하고 있는 굳건한 무언가가 또렷하게 만져졌다.
많이 변한 것 같지만 나는 여전히 그때와 같은 것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비슷한 문장에 설레고, 여전히 비슷한 노래에 빠져든다. 또 여전히 비슷한 풍경에 매료되고, 여전히 비슷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낮밤이 바뀌고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입고 있는 옷만 조금씩 달라질 뿐 그 안에 본질은 여전히 같은 것이다.
글을 읽기만 하던 사람이 쓰게 된 것. 그것은 언뜻 보면 대단한 변화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혜윤 작가 식으로 말하면)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것을 즐기던 사람이 이제는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싶어진 것일 뿐이다. '감지'이든 '연출'이든 어떻게든 '아름다움'에 근접해 있고 싶다는 욕망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많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와 어울리지 않음에도 나에게 덕지덕지 붙어있던 것들을 떼어내고,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님에도 내 안에 꾸역꾸역 채워 넣은 것들을 비워내어 더 자유로워지고 싶은 뿐.
사비나의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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