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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작 Jan 10. 2022

집(home)으로 본 <노매드랜드>(2020)

[부여된 의미]에서 [부여한 의미]로 그래서 [부유하는 삶]

<노매드랜드>에서 노매드(nomad)는 유목민이라는 라틴어 nomas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용어를 개념어로 철학에서 사용한 것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입니다. 그의 책 <차이와 반복>에서 '돌아다니는 시각'으로서 노마드를 사용하고, 이후 <천의 고원>에서 노마디즘이란 개념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잘 삶', '성공한 삶', '행복한 삶'에 이미 조건 지어진 혹은 정해진 무엇들에 반하는 것으로서 노마드를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리뷰의 부제를 <부여된 의미에서 부여한 의미로 그래서 부유하는 삶>으로 삼았습니다.


1.

    영화 <노매드랜드>는 주인공 펀(프란시스 맥도맨드 扮)이 창고 셔터를 열며 시작합니다. 그 안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가득합니다. 그녀가 한 옷을 들더니 갑자기 흐느낍니다. 그 창고에 보관된 물건은 단순한 물건이 아닙니다. 그녀에게 그 물건은 기억입니다. 다시 펀은 창고 주인에게 기억의 일부를 남겨두고 길을 떠납니다. 그녀가 끌고 다니는 차 역시 그녀의 시간이고, 돈이고, 그리고 기억입니다.

    

    그녀는 사막의 장미(desert rose)라는 캠핑장에서 머물며 아마존 임시근로자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영화에서는 아마존 출근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이때 카메라는 놓치지 않고 컨베이어 벨트 위로 흐르는 상품을 보여줍니다. 물건에는 바코드가 부여되어 있고, 가야 할 자리가 있으며,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일사불란하게 목적지로 향합니다.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물건-목적지]는 영화 전체에 걸쳐 주인공이 운전하는 장면에 대비됩니다. [물건-목적지] vs [운전자-길(road); 사람-인생]인 셈입니다. 펀은 식사시간 다른 동료들과 함께 둘러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서로 나눕니다. 한 노동자는 팔에 새긴 노래 가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집은 입에서 도는 말 뿐인가? 아니면 내 안에서 끌어낼 무엇인가?
Home is just a word? Or is it something you carry within you?
-<노매드랜드> 노랫말 문신 中


집(home)이 단어일 뿐이냐... 혹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냐... 집이란 단어에 대해 기표-기의를 묻는 장면입니다. 마치 신호등의 빨간색은 단지 색이냐(기표) 혹은 멈춰라는 의미이냐(기의)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일을 마치고 펀은 벼룩시장에서 아버지가 고등학교 때 사주신 단풍잎 시리즈 접시를 린다(린다 메이 扮)에게 설명해 줍니다. 남편이 만든 낚시 박스도, 접시도, 자동차도 모두 그녀에게 단순한 물건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단순 물건의 연장선에서의 집(house)을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펀은 자신이 하우스리스(houseless)이지 홈리스(homeless)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2.

    펀은 아마존과의 계약이 종료된 후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다시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린다에게 들은 RTR단체에 방문해서 평안한 시간을 갖습니다. 밥(밥 웰스 )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이 단체가 무엇인지는, 영화에서 그의 연설(?)을 통해 설명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돈과 시장의 횡포를 용인하고, 또 그에 순응합니다.
우린 기꺼이 돈의 멍에에 속박되어 한평생 살아가죠.
가축의 비유가 생각납니다...(중략)
우린 함께 서로를 돌봐줘야 합니다.
<노매드랜드>, 밥의 대사 中


    이 영화에서는 다른 화자들을 통해 연설로, 대화로, 조언으로 주제를 다양한 형태로 제시합니다. 이 영화가 형식적으로 탁월한 부분1은 <노매드랜드>의 주제를 주인공이 아닌 다른 사람은 말(word)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고, 주인공은 행동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그녀의 삶으로부터 끌어낸(carry within her) 의미로 제시하며, 앞서 인용한 노랫말에 대응됩니다.

    

    다른 한편 이 영화가 내용상 훌륭한 점은 그러니 우리는 도시의 삶을 버리자, 자본주의 삶을 해체하자, 지금 당신의 삶에 문제가 있다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끊임없이 그때는 옳았지만 지금은 틀릴 수 있고,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옳을 수 있다를 여러 대비를 통해 반복해 보여줍니다.

    

   관광객이 펀의 반지를 보고 끝 없는 사랑을 의미하는 둥근 원 반지 장면에서 데이브(데이빗 스트라탄 )의 캔 따게로 캔의 원 뚜껑을 돌려 따는 장면으로의 전환(원에서 다른 원으로), 토끼 고기 먹는 악어를 보며 무서워하는 장면에서 시뻘건 소고기 두덩이 굽는 장면으로의 전환(고기에서 고기로), 깃털이 이쁘다며 칭찬과 함께 가금류에게 모이를 주는 장면에서 통바비큐가 된 가금류로의 전환(새에서 새로)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영화 러닝타임에서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펀의 운전 장면은 앞서 말씀드린 택배와 컨베이어 벨트에 대비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대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런 대비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입장에 따라 다르다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삶에 항구처럼 명백한 답이  있다면 정박하겠지만, 삶은 그렇지 않기에 <노매드랜드>, 즉 [부유하는 삶]일지 모릅니다.


3.

    그렇다고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살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에서는 차박시 자신의 대소변을 어떻게 처리할지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우선 20리터짜리 양동이를 권하고, 소유한 차가 작으면 7리터를, 그리고 무릎이 안 좋으면 25리터를 추천합니다. 이 장면에서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자기 똥은 자기가 치워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대사가 <노매드랜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스웽키(샬린 스완키 扮)는 폐암이 뇌로 전이되어 7개월 시한부를 판정받고, 병원에서 시간 낭비하지 않을 거라며 치료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당당히 자신의 삶을 정리해 나갑니다. 펀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담담히 "이만하면 잘 살았다"라고 평합니다. "야생 무스 가족을 보고, 큰 펠리컨이 스치듯 지나가고, 수많은 제비 떼가 날아오는 모습을 봤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죽어도 여한이 없고, [완벽한 삶]이었다고 말합니다.

    

    완벽(perfect)에는 더 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 자체가 전체입니다. 즉 외부가 없습니다. 이 말은 결핍이 없기에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스웽키가 내뱉은 [완벽한 삶]은 린다가 애리조나에 짓겠다는 [자급자족]하는 주택, 즉 자립형 하우스와 같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대다수는 [성공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성공에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 달성률에 따라 평가됩니다. 대개 이 평가는, 뿐만 아니라 목적도 내가 아닌 남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가 오늘 1일 1 통닭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했다고 성공한 인생이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공한 인생은 한도 없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스웽키의 완벽한 삶, 린다의 자급자족은 모두 "자기 똥은 자기가 치워야 한다"와 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일부터 저렴한 땅을 알아봐서 농사를 지어야 할까요? 결코 영화는 현실을 떠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영화 내내 펀은 계속해 일을 합니다. 현실에 뿌리를 내려 양분을 섭취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노동 장면을 보면서 [돈의 멍에에 속박]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영화는 철저하게 노동을 삶의 수단으로서 보여줍니다. 노동을 위한 삶이 아니라 [삶을 위한 노동]인 셈입니다.



4.

    펀, 그녀가 자고, 먹고, 싸고, 기념하는 차가 고장 났습니다. 수리공은 차량 잔존가치의 절반 정도가 수리비이니 그 돈에 좀 더 보태서 다른 차를 살 것을 권유합니다. 이에 펀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그리고 거절 말미에 "저는 거기에 살아요. 그곳은 제 집(home)이에요"라고 말합니다. 펀은 수리비를 마련하기 위해 내키지 않지만 가족에게 돈을 빌리러 갑니다. 그리고 언니 일행은 펀의 방문을 환영하며 소소한 바비큐 파티를 합니다. 오랜만의 그럴듯한 식사 자리에서 펀은 부동산과 관련한 대화에 그만 흥분하고 맙니다.


2008년에 집을 왕창 샀으면 돈을 벌었을 텐데
부동산은 결국 오르게 되어있어
-<노매드랜드> 언니 남편 조지의 동료 대사 中


평생 모은 돈에 빚까지 내가면서
무리하게 집을 사라고 부추기는 거
난 이해가 안 돼요
-<노매드랜드> 펀의 대사 中


    삶의 영위로서 집(home)과 소유로서의 집(house)이 충돌하는 지점입니다. 이 충돌은 지금 우리가 처한 부동산 문제와도 같습니다. 삶을 영하기 위한 공간인 집이 어느새 우리에게 거래해야 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소유의 방식은 더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것으로 끊임없이 교체해 갑니다.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못한 사람 모두에게 안정적이어야 할 집이 안타깝게도 불안정적이며, 모순되게도 불안정을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네 집(home)은 집(house)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요.2

    

    <덩케르크>의 병사들이 되돌아가고 싶던 곳, <글레디에이터>(2002)의 위대한 장군 막시무스(러셀 크로우 )가 모든 제안을 뒤로하고서 가고 싶던 곳, <기사 윌리엄>(2001)의 윌리엄(히스 레저 )이 가고 싶던 곳 그 모두 집(home)입니다. 최근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도 그 부제인 <홈커밍>, <파프롬홈>, <노웨이홈>에도 모두 집(home)이 들어갑니다.  에단 호크의 <가타카>(1998)의 마지막 대사도 바로 "May be I'm going home"입니다. 도대체 집(home)에 어떤 꿀을 발라 놓았기에 다들 그렇게 가고 싶었던 걸까요.

    

    <노매드랜드>에서 집(home)은 가족도, 기억도 모두 [필요충분]조건이 아닙니다.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집입니다. 그래서 불편 없이 잘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누구에게는 이에 가족이 필요하고, 누구에게는 다른 게 필요할지 모르죠. 어쨌든 나의 자연/본성(nature)이 무엇인지는 오직 자신이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대원칙인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우는" 그 한도 내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인생이 완벽]해질 수 있는 [출발점]에 선 것입니다.




* 여러분의 라이킷은 다음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됩니다. 라이킷을 먹고 자라는 호덕 올림.


1. 형식적 완결성을 갖춘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노매드랜드>입니다. 자막으로 시작해서 장면으로 그리고 장면에서 자막으로 끝내기 때문입니다. 첫 장면은 주인공 펀이 살아왔던 마을의 폐쇄, 즉 그 [끝]을 안내하는 자막 후 그녀가 창고 셔터를 여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그 창고 셔터를 닫고 길을 나서며, 그 끝으로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이란 자막으로 막을 내립니다. 앞서 브런치에 올렸던 다른 영화들도 이러한 형식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푸른 지구로 시작해서 갈색 흙 지구로 끝내는 <그래비티>, 사물의 가치를 베스트 오퍼하는 시작에서 자기 인생의 가치를 베스트 오퍼하며 끝나는 <베스트오퍼>, 무엇보다 나를 미치게 하는 것은 돈이라하며 시작하고, 무엇보다 돈에 미친 세상으로 끝맺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빗물로 시작해서 바닷물로 끝나는 <아가씨>, 가족과 함께하는 음악으로 시작해서 가족이 남긴 음악으로 끝나는 <가오갤2>, 누가복음 텍스트로 시작해서 누가복음 장면으로 끝나는 <곡성>, 더 내려갈 곳 없는 곳에서 시작해서 더 올라갈 곳 없는 곳에서 끝나는 <기생충>, 의사 스트레인지로 시작해서 법사 스트레인지로 끝나는 <닥터 스트레인지>, 모두 시작과 끝이 책의 시작과 끝처럼, 열고 닫는 것처럼 짜여 있습니다.


2. Home이라는 주제는 추후 <오징어 게임>에서 "왜 성기훈은 쌍문동 성기훈이라고 할까"와 관련해 작성하겠습니다.

이전 06화 제목으로 본 <그래비티>(Gravity,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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