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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품있는그녀 Aug 19. 2020

16. adhd가 adhd에게

네 꿈을 펼쳐라

그때 나는 이미 첫째에게 지쳐있었다.


우리 가족은 늘 화가 나있었고, 모든 화는 첫째에게 향해 있었다. 아이에게 화내는 남편에게 화내지 말라며 화내는 아내. 이해할 수도 견딜 수도 없다는 남편에게 내 새끼니까 건들지 말라며 아이를 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남편이 정말 후회할 행동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멍해지는 아이는 우울증인 엄마도 견디기 힘들었다. 다른 세상에 혼자 살고 있는 아이. 자신의 행동이 왜 잘못됐는지 모르는 아이. 욱 해서 폭발해버리는 아이... 하지만 언제나 인지발달과 언어발달이 좋으니 아이에게 특별한 문제는 없다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결론은 엄마의 사랑이 부족하고, 가족의 사랑이 부족하고, 아빠의 애정이 부족하고.... 늘 부모가 문제였다.

나는 유치원 교사에게 언제나 죄인이 되었고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나 노심초사였다. 아이가 집중해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엄격하게 대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그저 감사하다는 말뿐이 못 하는 못난 우리 가족이 슬펐다.

<연관 글: 선생님, 우리 아이는 adhd예요!>


아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고 자가진단을 해보았고,

역시나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수많은 고민의 밤을 지나서 심리상담소에 가서 adhd 검사를 받았다. 상담소 선생님은 교육기관에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유한 것이 아니라서 큰 문제는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극성스런 엄마 정도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연관 글: 우리 아들은 adhd인 것 같다>


결과는 역시나 adhd 소견이 매우 높고, 당장 치료를 시작하자고 했다. 이 상태로 두면 우울증이 올 수도 있고, 내년에 학교 들어가서 적응하기도 힘들 것이라며.... 하지만 이미 유치원에서는 부적응 중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우처 지원을 받으며 치료를 받고 싶었지만 이미 아이가 유치원 생활을 너무 힘들어하고 있었기에 그까짓 돈 몇 푼(2배 가격) 아낀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라며 치료를 시작했다. 그래도 2개월 후부터는 바우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연관 글: adhd검사와 미술심리 상담>


약물 치료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약의 가장 최악의 부작용이

'입맛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부모에게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2018년 9월부터 아이는 '놀이치료'를 시작했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서 규칙을 배웠고, 게임에서 자신이 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고, 공감하는 것을 배웠다.


유치원 선생님과도 소통하여 도와달라고 하였고, 더 이상 아이에게 엄격하게 대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를 훈육한다며 아이를 때렸던 방과 후 교사에게도 아이의 상태를 알리고 이해를 구했다.

<연관 글: 아이가 선생님께 머리를 맞고 왔다>


남편도 처음엔

"내 아이가 무슨 문제냐"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며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끈질긴 설득 끝에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아이의 특이점을 인정했다.

인정하고서도 아이를 받아들여주지는 못했지만 전보다 화내는 것도 줄었고, 아이의 문제 행동을 특성이라 생각하고, 의도적이라는 생각을 줄이니 아이는 자신이 이해받는다고 느끼며 점점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일상생활은 버벅대고 여전히 딴 세계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끔 현실로 와서 무언가 노력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동생에 대해서도 자기랑 다르고, 어린 동생이라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희망이 생겼다.

아이는 친구들을 이해하고 친구의 행동을 오해하지 않는 방법을 스스로 알 수 없는 아이였다. 그것을 알려줘야만 했고, 덕분에 점점 친구관계도 좋아져서 유치원 졸업 때는 너무 달라진 모습으로 졸업을 하였다.

유치원 담임선생님은 우리 아이에게 애틋했다. 자기 유치원 생활 동안 가장 어렵고 난감했다고 했다. 하지만 달라져서 나가니 너무나 좋다고 하였다. 나도 당신의 노력이 너무나 감사했다.

<연관글: 감격의 졸업식>





당시 아이를 도와주기 위해 adhd에 대해서 정말 열심히, 내가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자료를 찾아 공부했다. 그런데 점점...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고, 신경정신과에 가서 검사를 의뢰했지만 우울증일 때는 검사할 수 없으므로 우울증 치료를 하고 나서 검사를 해보자고 하였다.

<연관 글: 원망의 기도를 하며 베란다에 선 여자>


병원 약의 부작용으로 우울증을 치료하지 못하자, 나는 마음공부를 통해 우울증을 극복하게 된다. 그 후 나는 다시금 검사를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예약을 잡고, 한 달을 기다려서 드디어 검사를 받았고, adhd가 맞다는 답변이 나왔다.

<연관 글: 우울증 약, 저는 못 먹어요>

<연관 글: 우울증 처방전, 비용이 들지 않아요>


하지만 치료는 어렵다 하였다. 성인의 경우 보험 적용이 안 되어 약 값이 많이 비싸다는 것이다.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집중력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뜻이구나 싶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는 답변을, 검증을 통해 확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내 마음에 바람이 불었다. 스산하고 얼음장 같은 차디찬 바람이 불었다.  죄책감의 바람이었다.


이미 공부를 통해 알고 있었다. adhd는 유전이 될 확률이 높다고. 검사 결과를 듣기 전에도 '나 때문에 그런 것 같아'라고 생각했으면서 말이다. 막상 확답을 듣고 나니 나는 주홍글씨라도 달아버린 듯이 막막해져 버렸다. 그러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로부터 며칠이 의미 없이 지나갔다. 나는 아이보다 더 멍해진 상태로 겨우겨우 일상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옆에서 엄마가 무얼 해야 할지 알려줘야 할 정도로 나의 정신세계는 무너져 있었다. 만약 누군가 콕 찌르면 그대로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산산조각 난 유리잔을 간신히 이어 붙인 것처럼. 그렇게 나는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이전처럼 덮어버릴 수도 없었다. 아이에게 향하는 죄책감, 그 너머에는 부모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있었다. 이런 나를 단 한 순간도 이해해주지 않았고, 나를 문제아 취급하며 구박데기로 살았던 그 과거 말이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 옛날 내가 그들로부터 들었던 욕을. 나는 정상이었다고, 다만 아팠을 뿐이라고. 내가 지금 이렇게 정상적으로 살지만 가끔 우울에 빠지는 이유는,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adhd 였고, 내 의도나 내 마음이 나빠서가 아니라, 내 머리가 조금 고장 나서, 마음이 시키는 충동을 머리로, 이성으로 억제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렇게 이해받지 못할 행동을 했던 것뿐이라고.


나도 그저 부모님께 평범하게 사랑받는 여자아이이고 싶었다고. 나도 잘하고 싶었다고. 나도 인정받고 싶었다고. 나도 안아주기를, 따뜻하게 품어주기를 바랐다고!


그렇게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있지도 않은 부모님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목놓아 울었다. 아픈 가슴에 피눈물이 흐른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억울해서 몇 날 며칠 잠을 못 이루던 그 어린날의 밤들. 수많은 고통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끝에는 두려움에 웅크린 어린 내가, 반대편 이쪽 끝에는 상처 받은 나의 어린 아들이 서 있었다.


가슴이 찢어지면 이렇게 아플까. 내가 겪은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 어린 아들의 발 앞에 레드카펫처럼 놓이는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큰 상처가 되었던 나의 부모님의 태도. 그것을 나도 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내 부모처럼 나도 아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내가 쏟아낸 원망은 고스란히 나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와 박혀 버렸다.

 




'이제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어!'


과거에 붙잡힌 채로 살 수 없다. 내 부모는 무지했고, 당시에는 다들 그랬다. 내가 성장하던 시기에는 이런 병명이 있지도 않았다. 물론 증상과 증세는 있었지만,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였던 문제겠지만. 어쨌든 나의 이런 문제는 알아낼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다만 부모님이 나를 좀 더 잘 보살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흘러간 과거를 다시 끄집어 와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할 수 없는 과거를 붙드는 것은 망령일 뿐이었다.


'이제는 내 삶을 살아야 한다!'


아이와 나. 우리 둘이 해결해 나가야 할 미래다. 그 안에서 나의 역할이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그리고 나는 다짐했다.


'내 꿈을 실현할 거야!'


내가 글을 쓰고 싶었던 그 꿈을 실현시키자고 마음먹었다. 엄마도 adhd로 살았고, 엄마는 치료도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뒤늦게라도 알고 이렇게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고. 그러니 너도. 너도 네 꿈을 펼치라고.


"너도 엄마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잘 해낼 수 있어!"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했다. 글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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