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브런치에 연재했던 <기자가 기사를 읽는 법>을 다시 이어서 연재합니다. 20회를 목표로 세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혹시 '통신사通信社'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SKT나 KT 같은통신사말고요. 들어본 것 같다고요? 그렇다면 분명 평소 시사 쪽이나 언론계 돌아가는 사정에 꽤 관심이 있으신 분일 겁니다.
이 말을 몰랐어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 말입니다. 저도 신문사에 입사해 경찰서에서 훈련을 받을 때 이 단어를 처음 들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주변에 물어보니 "처음 들어봤다"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언론계 바깥에선 분명 낯선 용어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통신사에 대해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만큼 언론계나 기사 제작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통신사란 무엇일까요?
통신사는 쉽게 말해 '뉴스 도매상'입니다.
언론사들의 언론사라고나 할까요? 신문사나 방송사 같은 곳에 전재 계약을 맺고 뉴스를 판매합니다. 물론 지금은 통신사들이 온라인으로 직접 기사들을 내보내면서 정체성이 많이 모호해졌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도매상으로서의 역할에 굉장히 충실했다고 합니다. 당시 통신사 기자들이 쓴 기사에 '바이라인'이 따로 붙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죠.
정체성이 모호해지긴 했지만 언론계에서 통신사의 역할은 여전히 크고 중요합니다. 어쩌면 '핵심'일지도 모릅니다. 기성 언론사들의 통신사 의존도, 그중에서도 <연합뉴스>에 대한 의존도가 굉장히 높기 때문입니다.
매체를 막론하고 데스크들의 <연합> 의존도는 대단히 높다.
현재 우리나라의 통신사는 <연합뉴스>와 <뉴시스>, <뉴스1> 3곳입니다. 연합뉴스는 정부 보조금을 받는 '국가기간통신사', 뉴시스와 뉴스1은 머니투데이 그룹 자회사들로, '민영통신사'라고 불립니다. 모양은 조금 다르지만 하는 일은 같습니다. 기사를 가장 빨리 내보내는 일, '속보'입니다. 통신사 기자의 모든 관심은 속보에 쏠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도매상이 소매상보다 발이 느려선 안 될 일이니 말입니다. 어느 출입처든 통신사 기자들의 타자속도는 가히 신기神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통신사를 바라보는 언론사의 시선은 양가적입니다. 일반적인 공급자-수요자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기사 쓰는 데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쟁자로서의 긴장이 공존합니다. 특히 현장 기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통신사 쪽 잘못이 아닙니다. 어느 언론사든 데스크들이 통신사를 따라가려는 경향이 강해서 그렇습니다.
"너 왜 이렇게 썼어? 연합은 이렇게 썼던데.. 이거, 확실해?"
"네, 부장. 제가 확인한 바로는..."
"다시 확인하고 보고해! 뚝."
이런 대화가 비일비재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통신사, 그중에서도 <연합뉴스>가 데일리 뉴스 생산 메커니즘의 핵심에 있는 것입니다. 베껴쓰든 반대로 쓰든 <연합>은 뉴스 생산에 있어 어떤 '기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가급적이면 시류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으려는 데스크들의 안전지향이 이같은 실랑이가 생기는 배경입니다.
물론 잘 찾아보면 그렇지 않은 곳도 분명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보수든 진보든, 신문사든 방송사든 "우리 부장은 연합만 너무 따라간다", "우리 부장은 연합 베껴쓰기밖에 못한다"는볼멘소리가 나오는 것은 다 마찬가지였습니다.(여담이지만 기자가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에 이 장면을 넣으면 기자 사회에서 큰 호응을 받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AP통신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퓰리처상 대상을 수상했다.
물론 통신사 기자들도 고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기사를 커버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입니다. 자의반 타의반 '기사를 빠짐 없이, 실수 없이 내보내는 것'이 통신사 기자의 덕목처럼 여겨지는 탓에 방송이나 신문에서는 쓰지 않을 법한 조그마한 사건들도 모두 써야합니다. 업무량이 살인적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통신사에는 1년에 기사를 1000건, 2000건씩 쓰는 기자들이 수두룩합니다. 다른 기자들 사이에서 "나는 시켜줘도 못할 것 같다" "존경스럽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통신사 기자들이 남들보다 빠르게 기사를 쓸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아마 '역피라미드형 기사'에 가장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피라미드형 기사는 뉴스의 가장 핵심되는 부분을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적어내려가는 기사 형태를 말합니다. 문장은 요점만 간단히, 간결하게 씁니다. 꼭 통신사만 이렇게 쓰는 것은 아니지만, 통신사는 거의 모든 기사를 이렇게 쓴다는 점에서 다른 매체와 차이가 있습니다.
역피라미드의 시초 역시 통신사였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AP통신이 전황을 신속하게 보도하기 위해 이런 방식을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65년 4월,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 사건 때 나온 AP기사가 시초라고 합니다.
Washington, April 14, 1865 To the Associated Press(AP):
The President was shot in a theatre tonight and perhaps mortally wounded.
안타깝게도 뉴스의 속도와 질은 반비례하기 마련입니다. 통신사 기사는 압도적으로 빠른 반면 다른 매체들에 비해 아무래도 기사의 깊이나 밀도, 읽는 맛이 떨어집니다. 러프하게 그린 밑그림 같은 느낌이랄까요? 통신사에는 이런 류의 기사 쓰기를 선호하는 기자들이 많지만, 깊은 회의감에 빠지는 기자들도 더러 있습니다.
이런 탓에 통신사 기자들은 일찍부터 번아웃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최근 수년새 통신3사 모두 '저연차 엑소더스'를 겪으며 내부에서부터 변화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런 분위기, 업무량과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 통신사들이 기획기사를 늘리고 탐사보도팀을 신설한 것이 속보 중심의 조직문화를 개선하려는 노력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출입처에서 기자들은 가급적이면 통신사 기자들과 친해지려 노력합니다. 출입처의 온갖 정보가 모이는 통로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독'을 썼을 때 통신사의 역할이 몹시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껏 열심히 취재해 기사를 썼더라도 통신사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이슈로 재생산되기 어렵습니다. 통신사가 받지 않으면 다른 매체 기자들은 위에다 이렇게 보고합니다. "아, 그거 확인해봤는데 얘기 안 됩니다. 연합도 안 받았던데요? 킬하겠습니다." 물론 누가봐도 탁월한 단독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