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A R T 1 공 부 의 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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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일행이 본부로 돌아온 그날 저녁, 기린은 모두를 위해 만찬을 준비하였다.
긴 테이블에는 각종 채식 요리와 각 동물들이 좋아하는 맞춤 음식이 놓여있었다. 카피바라, 다람쥐, 버니, 그리고 기린을 위해서는 페타 치즈가 들어간 그릭 샐러드가, 거북이를 위해서는 해초가, 파랑새를 위해서는 지렁이가 잔뜩 들은 바바 가누시가 준비되었다. 잡식성인 강아지, 고양이, 너구리를 위해서는 참치캔과 피자가 놓였고, 마지막으로 사자와 흑표범을 위해서는 안의 내용물을 알 수 없는 특별한 만두가 준비되었다.
"오늘 이 자리는 버니의 구출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요. 저희 오라클들이 공표할 것이 있답니다."
다 같이 떠들며 식사를 하던 중, 기린이 잔을 들고일어나 말을 꺼냈고, 영문을 모르는 동물들은 서로를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저희 오라클들은 이곳 아프리카를 떠나 신의 목소리를 더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길 계획이에요."
"어디로 가려는 거죠?"
사자가 처음 듣는 기린의 말에 놀라며 묻자, 흑표범이 옆에서 대신 답했다.
"히말라야로 갈 거랍니다. 저도 기린을 따라갈 거고요."
계속 놀라는 사자를 보고 기린이 차분하게 말했다.
"궁극의 자세를 찾았으니, 저희도 이제 아무 걱정이 없어요. 거북이와 여우가 합력해서 GPT를 완성시키고, 카피바라가 핸드폰을 조달해 오면 동물들의 공부 프로젝트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앞으로도 기린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우린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뗐을 뿐이잖아요."
사자의 말에 기린은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고양이를 보고 물었다.
"고양이는 앞으로 가장 걱정되는 것이 무엇이죠?"
고양이는 기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지만, 자신이 생각하던 대로 대답했다.
"저는... 앞으로 우리가 공부를 하면서...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면, 인간들과 마찰이 생길까 봐 걱정이 돼요."
"제 생각하고 비슷하네요. 바로 그 문제를 고양이가 계속 고민해 줘요."
모두가 기린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해하는 순간, 기린이 갑자기 고양이의 머리에 앞발을 얹고, 고양이의 앞발에 앵크(ankh)를 쥐어주었다. 그것은 생명을 상징하는 문양이자, 오라클들이 대대로 전수하는 신성한 상징이었다. 1)
"갑작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우리 오라클들도 후계자를 정했답니다. 바로 고양이예요." 1)
기린의 발표에 고양이는 물론 다른 동물들도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기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기린이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예지력만으로 미래를 보는 관행은 점차 사라져 갈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는 가장 과학적인 동물이 여러분을 돕도록 결정했어요."
그리고는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든 동물들을 차례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가 서약할 것이 있어요. 잘 알겠지만, 동물들이 잘 공부할 수 있도록 여기 있는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야 해요. " 2)
순간, 흑표범이 바로 자리 뒤에 준비해 두었던 스크롤을 꺼내어 들었다. 동물들이 보니 스크롤에는 '삼계명'이라는 특이한 제목과 함께 흑표범이 써놓은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이 스크롤에는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삼계명을 적어놓았답니다." 3)
1. 최고의 일곱 마리는 사자를 보필하여 이 세상 모든 동물들에게 지식을 전파하는데 노력한다.
2. 모든 동물들이 앉아서 공부할 수 있도록 '궁극의 자세'를 가르친다.
3. 동물들이 인간에게 모범이 되는 날까지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
"흑표범과 제가 떠나도 이걸 잊지 말고 꼭 지켜주세요. 저희가 없어도 여러분이 잘해주리라고 믿어요.”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서명을 한 뒤, ‘쿵'하는 울림소리에 사자 발바닥 도장이 최종적으로 찍혔다. 그리고 그 순간 동물들은 자리 앞에 놓인 포도주 잔을 들어 건배를 하며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였다.
1) 고양이가 새로운 오라클이 된다는 것은 동물세계가 직관이나 미신보다는 과학을 받아들여 미래를 예측하게 됨을 의미한다. 고양이가 왜 오라클로 점지되었는지 궁금하다면 <부록: 오라클의 새로운 후계자 고양이>를 참고하자.
2) 앵크(Ankh)는 원래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집트의 유물들에서 신들이 이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동물이 인간의 상징들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단순한 차용일 뿐, 동물들이 인간들의 문화적, 종교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3) 이후 동물들은 삼계명을 담긴 스크롤과 함께 사자가 새로 쓴 ‘사자의 요가책' 원본을 언약의 궤 (Ark of Covenant 혹은 Tabut라고 부르는 상자)에 담아 에티오피아 악숨에 있는 아버지 사자의 궁전에 보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