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집의 조건은 무엇일까 by 믹서
신혼집에서 꼬박 2년을 살았다. 그쯤이면 새로운 집에 대한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가 아니던가. 열댓 평 정도인 집은 아담했지만 조금 답답했고, 대중교통이 편리했지만 그만큼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부부 싸움이라도 한 날엔 불만이 터졌다. 한숨 소리도 숨길 수 없는 작은 공간에서 뛰쳐 나와야 하는데, 조용히 마음 정리할 만한 장소도 마땅치 않았으니 자연스럽게 읊조리게 된 말.
이사 가고 싶다
2014년 말에 이사 결심을 했다. 7년 전이니까 부동산 상황이 지금과는 달랐다. 그때만 해도 서울 아닌 경기도는 합리적인 가격의 전세가 가능한 시절이었다. 지인들이 남양주 별내를 많이 추천해서 그쪽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동네도 조용하고 서울보다 도로도 넓어서 여유로워 보였다.
주택가 인근에는 하천을 끼고 카페 거리와 산책로도 형성되어 있었다. ‘부부 싸움하면 여기로 나와야겠군’ 하는 생각에 설렜다. 부동산을 통해 빌라 몇 군데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본 복층 집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신혼집의 두 배 정도는 돼보였다. 집은 운명처럼 찾아온다 했던가. 더는 집을 알아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눈이 하트가 되어 계약서를 썼다. 그렇게 서울시민을 내려놓고 경기도민이 됐다.
신혼집 살림을 다 가지고 왔는데도 공간이 한참 남았다. 집이 넓어졌으니 당연히 그러했다. 지금 생각하면 '여백의 미를 느꼈어도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아쉽게도 그때는 반대의 선택을 했다. 한을 푸는 것처럼 가구 쇼핑을 해댔다. 작은 집에선 어림없었던 큰 TV 수납장과 대형 소파를 시작으로 집안 곳곳을 장식장과 수납장으로 채웠다. 주말마다 공들여 인테리어를 했다. 몇 달에 걸쳐 드디어 마음에 드는 물건들로 가득한 예쁜 집이 완성됐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경기도지만 지하철이 다니는 곳이니 괜찮다고, 별내역까지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 했지만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으니 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확실히 서울과는 달랐다. 버스 배차 시간이 길어서 마을버스 타는 일이 예상보다 어려웠고, 출근 시간에는 붐비고 길도 막혀 별내역까지 가는 데에 꽤 시간이 걸렸다.
용산에 있는 회사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얼마 간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결국 남편의 차를 타기 시작했다.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던 남편은 꼭두새벽부터 아내의 출근을 담당해야 했다. 퇴근할 때도 종종 차로 데리러 왔는데, 별내까지 가는 도로가 막혀 집에 오는 데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날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밥 먹는 날은 거의 없었고, 주로 외식을 하게 되었다.
아침에 나가서 밤 9시, 10시에 들어오다 보니 나의 예쁜 집을 누릴 시간이 별로 없었다. 산책할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퇴근해서 잠자기 바빴다. ‘이러려고 이사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주말에는 밀린 잠을 잤고 양가 부모님도 부지런히 찾아뵈어야 했으니 토, 일요일도 온전히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나에게 집은 손에 닿지 않는 신기루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며 아쉬움에 눈물짓는 여인처럼 집을 짝사랑했다.
힘겨운 출퇴근 생활을 하던 중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친한 회사 동료가 결혼을 하는데 별내에서 신혼집을 구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신혼집이 우리 집에서 3분 거리였다는 사실! 그 동료와 동네 이야기를 신나게 하다가 출퇴근 고민도 나누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동료가 던진 한 마디.
우리 카풀하죠
세상은 이래서 살만하다. 카풀 소식을 들은 남편도 함지박만한 웃음을 지었다. “잘됐네.”라는 말이 “나 이제 살았다!”로 들렸다. 동료는 별내를 떠날 때까지 내 출근을 책임졌다. 물론 얼마간의 교통비는 지불했다. 퇴근 시간이 맞으면 퇴근도 같이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동네 호프집에서 한 잔 하고 들어가는 일이 잦아졌고, 서로의 집도 방문하며 부부끼리도 친해졌다. 동료 부부와 우리 부부는 이웃이 되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별내에 살 당시 내가 맡은 프로그램에 남편이 작가로 함께했었다. 어느 날, 일 문제로 남편에게 연락을 했는데 전화를 안 받아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집에 있는 게 분명한데 연락이 안 되니 너무 걱정이 되어서 동료에게 부탁을 했다.
“혹시 네 아내 ㅇㅇ 집에 있으면 우리 집에 좀 들러줄 수 있으려나? 우리 남편 집에 잘 있는지 확인 좀 해줄 수 있을까?”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띠디디’ 소리에 화들짝 깨서 방문을 급히 닫은 남편은 동료의 아내가 부르는 소리에 “아 예예! 저 살아있으니 걱정 마시고 가 보세요”라고 답했다.다행히 동료의 아내가 집에 있었다. 초인종 소리도 못 들을 가능성이 있으니 현관문 비밀번호도 알려주었다. 동료의 아내는 우리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성큼 거실로 들어가서 “작가님 계세요? 저 ㅇㅇㅇ입니다!”라고 외쳤다.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띠디디’ 소리에 남편은 화들짝 깨서 방문을 급히 닫았다. 남편은 전날 새벽까지 일을 하다가 깊은 잠에 들었던 것이다. 동료의 아내가 부르는 소리에 “아, 예예! 저 살아있으니 걱정 마시고 가 보세요”라고 답했다. 동료의 아내가 안도하고 집을 떠나자 남편은 내게 전화해서 역정을 냈다.
“나 더워서 다 벗고 있었는데! 방문 빨리 안 닫았으면 큰일날 뻔 했잖아!”
무척 더운 한여름에 남편은 속옷까지 다 벗고 자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날도 그랬던 것이다. 하마터면 동료의 아내가 험한 꼴을 볼 뻔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지금도 가끔 우리 부부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웃곤 한다.
별내에서 살았던 기간은 1년이 채 안됐다. 갑자기 미국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 급히 집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에 가지 않았다면 별내에서 더 오래 살았을 것 같다. 넓고 예쁜 집, 산책로와 아기자기한 카페들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빛 좋은 개살구 같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 일에 몰두하느라 집을 누리지 못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별내에 살면서 알게 된 '이웃과 함께하는 기쁨'은 내게 큰 수확이었다. 실은 양가 부모님이 다 서울에 계신 까닭에, 경기도로 이사 오면서 우리 부부만 덜렁 낯선 곳에 뚝 떨어진 기분이 있었다. 그런데 동료 부부를 만나 함께 지내면서, 이웃의 존재로 인한 따뜻함과 안정감을 느꼈다.
좋은 집의 조건은 무엇일까. 직장 다니기에 편리한 교통, 지역의 인프라, 내가 만족할 만한 집의 크기가 전부일까. (물론 이 시대에 그 조건들 맞는 집을 구하는 거 자체도 너무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짧았지만 별내에서 이웃과 울고 웃었던 시간들은 집에 대한 나의 생각을 변화시켰다. 이웃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고, 집은 먹고 자는 곳만이 아닌 더불어 사는 공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별내에서 이웃과 사는 삶의 가치를 알게 된 후 우리 부부는 미국으로 훌쩍 떠났다. 가족도 이웃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니, 인생이란 참 아이러니하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별반 다르진 않겠거니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미국은 한인이 많이 사니까 이웃 만들기는 더 수월하지 않을까 싶었다. 과연 우리의 미국 집은 어땠을까. 다음 편에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