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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크루 May 24. 2020

기대했다가 실망했다가

크루즈 승무원의 격리생활 <51~53일 차>


51일 차 (생활 속 거리두기 16일 차) - 5월 5일



3월 16일 배가 격리된 이후로

매일 아침 전원 체온 검사를 하고 있다.


검사는 부서별로 이뤄지고

매일 저녁 전에 메디컬팀에게 보고하는 방식이다.


이는 격리 크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대신 부서별 검사가 아닌 메디컬팀이 직접 한다.


매일 아침 간호사 3명이 팀이 되어 움직이는데,

일단 시작하기 전에

복도에 도착함과 동시에 간호사들이

소리 질러 체온 검사를 한다고 알린다.


그리고는 간호사 1이

선수부터 중앙/선미까지 걸어가며

문을 두드려 격리 크루를 불러 낸다.


격리 크루는 각자의 문 앞에서 대기하게 되고


뒤따라오는 간호사 2가 체온기로 검사를 하고

소리 내어 체온을 부른다.


그러면 뒤따라오는 간호사 3이 그를 받아 적고


격리 크루는 문을 닫고 들어간다.


지금이야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초반에는 격리 크루가 자고 있거나

이 쉬운 절차도 좀처럼 따라주질 않아

간단히 끝나질 않았었다.


이날은 다음날 모두가 하선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체온 검사인 줄 알았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활짝 웃으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몇 번씩 인사하고

화기애애한 체온 검사였다.



다음 날이 하선이니

직접 들고 내릴 손가방을 제외하고는

모든 짐은 미리 수거하도록 했다.


보통 승객의 짐 수거 및 배부는

하우스키핑 부서만 담당한다.


하지만 지금은 최소 인원인 11명만 있기 때문에

각 부서에서 자원봉사를 모집했다.


물론 나도 함께 도왔다.


일차적으로는 짐 몰아놓기를 한다.


선수에서 중앙/선미까지 복도를 돌아다니며

각 문 앞에 내다 놓은 짐들을

선수 엘리베이터로 몰아넣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아주 놀랄 노 자다.


한 명이 짐 3개는 기본이거니와

최대 짐 9개까지도 있었다.


벽돌을 넣어놨는지 너무 무거워서

수트케이스가 끌리지 않는 짐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비닐과 테이프로 둘둘 말아 묶어 놓은 짐 중에는

지팡이, 분해한 보행 워커,

커다란 스피커, 텔레비전, 전신 거울, 냉장고 등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짐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적게는 4개월에서 길게는 10개월 동안

선내에서 생활할 짐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절대적으로 너무 과한 그 모든 짐들을


우리 모두 혀를 차며 땀을 흘리며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하선 그룹에 따라 나뉜

네 가지 색의 짐 표를 기준으로 짐을 구분하였다.


구분하는 대로 엘리베이터에 태워

덱 A (지하 1층)로 내려보냈다.



덱 A의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짐 표를 재확인하며

스크린 기계가 있는 쪽으로 짐을 옮겼다.


그 무거운 짐들을 일일이 올려 스크리닝 하는데


이게 또다시 놀랄 노 자다.


그릇 및 찻잔 세트, 커다란 칼,

오렌지 쥬스 만드는 기계, 크림 만드는 기계,

케첩이나 마요네즈 짜는 큰 통,

커튼 와이어 통째, 아령,

한 수트케이스에 들은 가득 들은 각종 건전지,

한 수트케이스에 가득 들은 중고폰 등


상상을 초월하는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필리피노 크루의 전력을 고려했을 때

이는 선사의 재산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총 24개의 짐은 추가 조사를 위해 따로 보관되었다.


나머지 짐들은 스크리닝 이후에

네 그룹 별로 나누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승무원 전용 식당에

차곡차곡 쌓아 보관하였다.


8시 반에 시작한 수거 작업이

성별, 나이, 부서할 것 없이 도와가며 하다 보니

예상보다 빠르게 11시 반에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오후에 오피스 근무를 하고 저녁을 먹고 있는데

캡틴의 방송이 시작되었다.


 캡틴 목소리는

항상 온화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데

이상하게도 화가 난 듯 들렸었다.


화가 난 듯이 아니라

내용을 들어보니 화가 난 것이 틀림없었다.


내일로 예정된 532명 격리 크루의 하선이

전면 취소된 것이다.


게다가 예정에 없던 COVID-19 검사를

내일 아침에 할 것이며,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48~72시간이 소요되고

그 이후에나 하선을 허가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4월 8일부터 마닐라 하선 협상을 시작했고

4월 19일에 선내 14일 격리 후 하선을 약속받았고

4월 20일부터 532명 의 선내 격리를 시작했고

4월 29일 갑자기 COVID-19 검사를 했고

5월 5일 격리 16일 차로 모든 하선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갑질도 주최 측 농간도 정도가 있다!!!!


532명의 하선은 물론

이후에 진행해야 하는 268명의 하선도 지연이다.


우리보다 늦게 마닐라 베이에 온 다른 선사에서

하선이 이뤄졌다는 소식을 들어도

선사마다 합의 수준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고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했었다.


선내 격리로 인해 추가된 일더미도

하지 않았어도 될 그 모든 일더미도

16일 동안 모두가 잘 참고 해내었다.


물론 자유를 빼앗긴 532명의 크루도

16일 동안의 격리 생활을 잘 참고 해내었다.


이 저녁의 소식은 우리 모두를 실망시켰다.






52일 차 (생활 속 거리두기 17일 차) - 5월 6일



집에 갈 줄 알고 몇 격리 크루들이 만든 메세지다.


이 외에도 각 방문에 붙여 놓은 그림 및 메세지,

캡틴 및 자원봉사 크루들에게 쓴 편지가 있다.


집을 코앞에 두고

하선하여 집에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텐데

그렇게 하루하루 격리 생활을 견뎌냈을 텐데

그들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국가는 국민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일까.


타국민도 아니고 자국민의 귀국이다.


자세하게는 531명의 필리피노와

1명은 싱가포리안이지만

필리피노 아내를 둔 필리핀 거주자이다.


16일의 정박비로는 부족한 것일까.


배가 우리 배만 있는 것도 아니고 17척이나 있었다.

앞으로 적어도 10척은 더 온다고 할 때이다.


도대체 얼마나 돈을 걷어내고 싶은 것일까.

그 돈 모아 다른 나라라도 하나 세우려는 것일까.



아침에 COVID-19 검사하러 온다던

Philippine Coast Guard는 깜깜무소식이었다.


혹시 몰라 아침 7시부터

지난 검사 세팅과 동일하게 준비하고 대기했다.


하루 종일 그들은 오지 않았고,


오후 5시가 지나서야

다음날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격리 크루, 비 격리 크루 할 것 없이

우리들의 기대와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53일 차 (생활 속 거리두기 18일 차) - 5월 7일



하선이 무산되어 이제는 짐까지 찾아야 한다.


다음 날 하선할 줄 알고 모두 다 짐을 싸버렸으니


당뇨약이 고혈압약이 비타민이 필요하다

피부 연고가 화장품이 필요하다

샴푸가 비누가 치약이 없다

속옷이 옷이 없다

등등


짐을 가져다 달라는 전화가 끊이질 않았다.


예정대로 하선하진 못했어도

제멋대로인 이 나라에서

갑자기 하선 허가가 날 수도 있는 노릇이고


그렇지 않다 해도 2000개가 넘는 짐을

힘들게 다 모아놨거늘 다시 돌려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매니저들이 내놓은 방법은

짐을 찾아야 한다는 요구가 있으면

약을 찾는 등의 긴급한 상황에만

색상 및 크기 등을 물은 뒤

우리가 직접 짐을 찾아 해당 물건을 찾아

격리 크루 방에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문제는 2000개가 넘는 짐이다.

차곡차곡 쌓아놓은 짐덩어리 산이다.


그 안에서 짐을 찾아야 한다.


반짝이는 검은색의 소프트 수트케이스라고 했는데

찾아보니 그냥 검은색의 하드 수트케이스이다.


검은색의 작은 하드 케이스에

빨간 끈을 묶어 놓았다고 했는데

빨간 벨트를 둘른 남색의 작은 하드 케이스이다.


힘들게 짐을 찾았는데 찾는 약이 없다.

다시 전화해서 물으니 다른 가방인 것 같다고 한다.

가방이 총 5개였다.


10개도 넘는 짐을 찾는 동안

PCG는 깜깜무소식이었다.


또다시 다음날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것도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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