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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크루 Jul 17. 2020

럭셔리 크루즈의 현 모습

크루즈 승무원의 격리생활 <117~119일 차>


117일 차 - 7월 10일


아침 7시가 되기 몇 분 전,

한동안 울리지 않던 긴급전화​가 울렸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혀가 꼬이긴 했지만 재빠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게다가 걸려온 번호는 객실도 아닌

절대로 사용할 일 없는 세미나실 같은 공간이었다.


Hello? How can I help?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내려놓기 무섭게 전화는 다시 울렸다.


다시 대답했고

또다시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렇게 거진 10번 넘게 반복했다.



진짜 긴급상황이 아닌데 긴급전화가 울리는 경우는

승객이든 크루든 실수로 버튼을 눌렀거나

하우스키핑이 걸레질을 하다가 모르고 눌렀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에도 정말 실수인지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전화로 다시 걸어 확인하곤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인할 틈도 없이 계속 울렸고

더 이상 울리지 않아 일반전화로 걸었더니

통화 중 신호음만 들려왔다.


객실도 아니고 왜 이 번호로 전화가 오지?

하우스키핑이 청소하나?

구석에 있는 작은 세미나실을 하필 이런 시간에?

매니저들 회의하나?

본사랑 컨퍼런스 콜 하나?


이래저래 생각해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찝찝해서 직접 확인하러 가기로 했다.


[원래 모습] 지난 1월, 승객을 위한 텐더 보트 세이프티 브리핑
이날 아침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었던 것이었다.


천장에서는 흐르는 빗물 같은 물줄기는

지난밤에 시작된 듯 보였다.


언제부터 어디서 새기 시작한 건지 알 수 없지만

그 물줄기가 탁자 위에 있는 전화기를 흠뻑 적셨다.


전화기가 일반 전화기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스마트 하단 말인가.


젖은대로 가만히 있어도 될 일을

긴급상황임을 알고 긴급전화를 걸었다니 말이다.


나는 서둘러 탁자 위에 있는

전화기 및 전기 제품을 분리해서

문 밖으로 내다 놓았다.


그리고는 이를 해결해줄 수 있는

ECR (Engine Control Room)에 상황을 알렸다.



Duty Engineer,

당시 근무 중인 기술자 아저씨가 바로 달려왔다.


물이 어디서 새는지는 찾아서 잠갔다고 했다.


파이프를 잠겄다고는 하나,

이미 흠뻑 젖어버린 탁자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축축 물소리가 나는 카펫,

기타 깨끗이 닦아내고 말려야 하는 것들은

하우스키핑 담당이다.


호텔 부서 전체를 책임지는 대빵 매니저 닐과

하우스키핑 매니저 올가에게 이를 알린 후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사실 이 정도는

크루즈 운영 재개를 위해 정비해야 할 문제 중

백분의 일도 안 되는 간단한 것이다.


지금 배 안은 이곳저곳 손 볼 것이 너무나도 많다.


2천 명의 승객과 천명의 크루가 매일 사용하고

이를 천명의 크루가 매일 청소 및 관리, 정비하면서

쉬지 않고 잘 보존해야 할 크루즈선이


단 백여 명의 손에 맡겨져서

차마 돌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다.


배의 구석구석 모든 곳에 손이 닿아야 하는데

그럴만한 충분한 일손이 없다.


그렇다고 배를 완벽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몇백 명의 크루를 부를 수는 없다.


승객이 없는 상황에서

인건비를 더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조만간 몇 크루들이

예정에 없었으니 추가적으로 계약을 마치게 된다.


최소 운영 인원인 Essential Manning​에서

극 최소 운영 인원인 Red Manning​에서

몇 명 더 잘라내는 것이다.


물론 그 크루 명단에는 내 이름이 없으니

예정대로 나는 남아서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예전의 모습, 승객으로 가득 차 활기차고 바쁘던

초호화 럭셔리 크루즈로 돌아가려면

적어도 두 달 정도는 재정비를 해야 할 것이다.


구석구석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면

천명의 정상 운영 인원이 전원 승선해야 한다.


정상 운영 인원이 승선한다는 것은

크루즈 운영을 재개한다는 가정하에만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이 이뤄지려면

크루와 승객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지만 가능하다.


모두의 승하선과 크루즈의 항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지만 가능하다.


올해 안에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내년 봄이나 여름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언제쯤 다시 활기찬 배로 돌아갈 수 있을까.


너무 활기차다 못해 바쁘고 지쳐 녹초가 되던

그 일상이 옛날 옛적 이야기만 같고

꿈같은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만 같다.






118일 차 - 7월 11일


스마트 폰보다도 더 스마트한 일반 전화기 덕에

대형 물 사태로 번지기 전에 방지할 수 있었던

세미나실에 다시 가봤다.


역시 다들 조치를 잘해서

큰 일은 나지 않고 마무리되어 가는 듯했다.


지난해 10월의 "진짜 긴급 물사태"


저녁 6시가 넘었는데도

불 끄고 커튼 닫으라는 캡틴의 방송이 없어서

이상하다 생각하며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바로 갔다.


바의 큰 유리창을 덮었던 검은 랩이 벗겨져 있었다.


벌써 해적 위험 지역​에서 벗어났던 것이었다.



어느새 아덴만 다 지나왔지..?


아무튼 이제 더 이상 해적에게 납치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119일 차 - 7월 12일


해적 위험 지역을 지나느라

일몰 전에 배를 어둡게 하고

일출 후에 배를 밝힐 수 있었다.


그 덕에 아주 오랜만에 아침 바다를 보게 되었다.


아침 해가 뜬지는 좀 지난 시간이었지만

아침 해가 비추는 바다는 더없이 반가웠다.



퀸 엘리자베스는 아덴만을 지나

홍해를 지나는 중이다.


2~3일 후면 홍해를 지나

수에즈 운하로 가게 될 것이다.


사막의 수에즈 운하가 너무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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