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개와 목줄
장면 하나. 벤은 어릴 적 목줄을 안 맸다. 놀이터를 갈 때도, 천변을 뛸 때도 녀석은 족히 50m는 날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딱히 누굴 해코지한 적도 없기에 난 녀석을 매어두지 않았다. 적어도 삼척 큰집에 가기 전까진 그랬다.
벤이 두 살 무렵 녀석을 할머니 댁에 데려간 적이 있다. 두 뼘 만한 녀석을 안고 사랑방에 들어서는 순간, 큰엄마의 호통이 날아왔다.
"어디 개XX가 집 안에 들어와."
그도 그럴 것이 시골의 개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대문 지킴이거나, 먹잇감이거나. 아빠는 짐을 풀기도 전에 벤을 안고 나왔다. 그리곤 목줄을 채운 채 읍내를 걸었다.
이웃 서너 집 개들의 목엔 밧줄 만한 끈이 채워져 있었다. 벤도 봤을까. 2m 남짓 직선 거리, 그게 녀석들에겐 세상의 전부였다. 아빠는 그날 결국 벤과 함께 차 안에서 잤다. 벤을 큰집에 데려간 건 그해 명절이 처음이자 끝이었다.
장면 둘. 큰 녀석 벤과 작은 녀석 베니(사실 덩치는 베니가 1.5배 정도 컸다)를 데리고 근처 공원에 갈 때면 목줄이 자주 엉켰다. 입맛, 덩치, 쉬 싸는 버릇까지 모든 게 달랐던 둘은 뛰는 방향도 틀렸다. 한 놈은 앞로, 또 한 놈은 옆으로. 한 녀석이 풀을 뜯으면, 다른 녀석은 이만 들어가자고 보챘다. 다른 무엇보다 줄 너머로 느껴지는 둘의 근력이 달랐다.
노견 벤의 목줄은 보통 느슨했고, 바닥에 끌렸다. 때가 잘 타서 세탁도 자주 했다. 반면 작은 놈을 묶은 줄은 늘 팽팽했고, 좌로 우로 그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다. 두 줄이 뒤엉켜도 어떤 게 누구의 줄인지 알만큼 그 세기가 달랐다.
장면 셋. 2013년 10월 중순 제주. 숙소가 있는 중문에서 강정까지 뛰었다. 강정마을 입구를 지나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돌담 뒤에 있던 개 한 마리가 내게 달려들었다. 악 소리를 내고 내빼려는데 쇠사슬 소리가 철컹 하고 났다. 녀석은 묶여 있었다.
그 와중에 유난히 반짝이는 사슬이 눈에 들어왔다. 새 목줄을 채운 모양이었다. 녀석을 보며 문득 어린 시절 삼척 큰집에서의 벤이 떠올랐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놈도 급히 채워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호젓한 시골 마을과 큼직한 쇠사슬. 이 어색한 조합 가운데, 인근 해군기지 공사장에선 망치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목줄과 개. 이 둘을 이보다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김기택의 '직선과 원' 중.
옆집에 개가 생김
말뚝에 매여 있음
개와 말뚝 사이 언제나 팽팽함
한껏 당겨진 활처럼 휘어진 등뼈와
굵고 뭉툭한 뿌리 하나로만 버티는 말뚝
그 사이의 거리 완강하고 고요함
개 울음에 등뼈와 말뚝이 밤새도록 울림
밤마다 그 울음에 내 잠과 악몽이 관통당함
날이 밝아도 개와 말뚝 사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음
(중략)
오늘 주인이 처음 개와 말뚝 사이를 끊어놓음
말뚝 없는 등뼈 어쩔 줄 모름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함
굽어진 등뼈 펴지지 않음
개와 말뚝 사이 아무것도 없는데
등뼈, 굽어진 채 뛰고 꺾인 채 달림
말뚝에서 제법 먼 곳까지 뛰쳐나갔으나 곧 되돌아옴
말뚝 주위를 맴돌기만 함
개와 말뚝 사이 여전히 팽팽함
벤과의 5600일 - 프롤로그
벤과의 5600일① 대낮의 실종
벤과의 5600일② 녀석의 간식들
벤과의 5600일③ 벤과의 러닝
벤과의 5600일④ 털 손질
벤과의 5600일⑤ 오줌 소탕작전
벤과의 5600일⑥ 사진 수집을 게을리한 개 주인의 푸념
벤과의 5600일⑦ 벤의 소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