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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명한 새벽빛 Oct 19. 2016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이 보여주는 생명의 기적

당신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요?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정보
* 스포일러 주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은 1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현재의 우리가 향해가고 있는 미래를 잘 그려놓은 것 같았어요. 롱테이크로 촬영한 장면들에 함께 숨죽이며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흥행에는 실패했다지만 꼭 한번 볼 만한, 봐야할 영화가 아닐까 혼자 생각했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아서, 학교도 놀이터도 필요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생기(生氣)가 없는 세상


2027년, 18년째 이어진 '불임' 때문에 아이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 세상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최연소자 디에고의 죽음이 보도되고 있는 장면에서 영화가 시작되었다. 뉴스를 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 같이 세상을 잃은 듯 침울하다. 디에고 이후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지 않았기에, 디에고의 죽음은 마지막 남은 희망의 불씨마저 맥없이 꺼져 버렸다는 느낌을 주었다. 사람들에게는 오직 죽음을 기다리는 일만이 남아 있다. 심지어 정부는 '편안한 죽음'이라는 약까지 합법화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


영국으로 불법 이민자들이 넘쳐 나자, 정부의 이민자 탄압도 심해졌다. 카메라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기게 되는 거리에는 불법 이민자를 가두기 위해 설치한 감옥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을 외국인들이 가득하고, 무장군인들이 그 곁을 지키고 있다. 테러도 일상이 되었다. 긴장감만 감돌 뿐, 사람들의 표정에서 웃음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영화가 그려놓은 미래에서 사라진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닮아 있다. 아이들이 있어도, 아이들마저 해맑은 웃음을 잃어가는 우리 사회의 생기 없는 모습. 그것은 어쩌면 우리 마음이 '생명'을 잃었기 때문은 아닐까?


영화에서 가장 해맑게 웃는 재니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일까?


"정말이지, 사는 게 무의미해요."

주인공 '테오'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그의 친구이자 시사 만화가인 '재니퍼'의 말에 의하면 그 아이, '딜런'은 테오의 '신념'이 낳은 열매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결국은 폐렴으로 목숨을 는다. 영화 초반, 오가 현실에 대한 자신의 절망적인 심정을 털어놓았을 때 재니퍼가 그럼 자신이 사는 곳으로 오라고 하자 테오는 이렇게 받아쳤다.

"그럼 희망을 걸 일이 없잖아요."

한 때는 사회운동가였다가 지금은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테오지만,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딜런의 죽음 때문에 테오가 좌절했던 것은 사실이다. '신념'이 낳은 열매를 '운명'이 거두어 가버린 셈이었으니까. 중반부에 재니퍼가 '키'와 산파 '미리엄'에게 이 이야기를 하며 '신념'이 '운명'에 졌다고 표현하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모든 게 운명이면 왜 굳이 싸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리엄'은 이렇게 대꾸했다.

"모든 것은 이유가 있어요."

무슨 이유? 빌어먹을 정해진 운명? 그들에게 펼쳐진 끔찍하기만 한 현실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것조차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회개파니 단절파니 인류의 종말에 대한 여러 가지 종파도 생겨 났다. 정부는 무력을 남용하고, 이민자들은 반정부 테러단체를 만들어 저항한다. 그 때, 테오의 전 부인 '줄리안'은 이민자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싸우는 피쉬단의 리더로 테오 앞에 나타났다. 그를 믿는다며, 기적적으로 아이를 임신한 외국인 '키'를 '인간프로젝트'를 위한 배인 '미래Tomorrow호'까지 무사히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이기 때문이었는지, 놓지 않았던 희망의 끈 때문인지, 그 부탁을 받아들인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생명'만이 옳았기에.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에 '희망'이 있을까?


그렇게 테오는 줄리안이 말한 대로 '키'를 해안까지 데려가기 위해 필요한 여행증을 만들어 달라고 하려고 사촌인 미술품 보호청장, 나이젤을 찾아간다. 끔찍했던 거리의 모습과 상반되게, 정부 기관의 모습은 말 그대로 '으리으리' 했다. 미술품 보호청, 세계 각지에서 파괴될 뻔한 미술품을 모아서 보호하는 것이 기관의 일인 듯했다.

"지금부터 백 년 후엔 이걸 볼 사람도 없을 텐데 왜 모아?"

예리한 테오의 물음에 나이젤은 태연하게 대답한다.

"난 미래를 생각 안 해."


후손이 태어나지를 않으니, 더 이상 인류가 영위할 미래가 없는 상황에도 사람들은 더 가지려 하고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특히 이민자 수용소에서는 자신의 눈 앞에서 누가 죽어도 그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욱 적나라했다. 이 점에서는 부자든 난민이든 똑같다. 크고 넓고 안전한 곳에서 산다고 그의 미래가 다를까? 우리는 끊임 없이 미래를 알고 싶어하고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불안해 하고 괴로워 하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미래를 알 수는 없다. '미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장 내가 언제 죽지도 모르는 것처럼, 미래에 '희망'이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가 없다.



'희망'은 우리의 '신념'이 낳는 열매


영화 속에서 불임의 원인이 밝혀지지 못했던 것처럼, 굳이 생명의 탄생이 가능했던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20여 년만에 ' 생명'이 태어난 것은 그것 자체로 '기적'이었다. 흑인 소녀 '키'의 품에 폭 안겨 있는 갓난 아기를 보고 절망 뿐이던 사람들의 표정이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바뀌는 장면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이민자들을 향해 사정 없이 총을 쏘던 군인들이 사격을 멈추고 신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생명의 존엄성 앞에, 잠깐이지만 인종도, 국적도, 지위도, 종교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이 일어나도 달라지는 것은 다. 테오 일행이 지나가자 마자 금방 다시 시작된 총격전, 그리고 폭발.


엔딩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의 엔딩은 아기를 안은 '키'가 무사히 '미래호'를 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미래호가 키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듯한 움직임까지였다. 그런데 그대로 까만 엔딩 크레딧으로 바뀌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렸다. 나는 다시 한 번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들이 사라진 세상 다시 '시작'되는 아이들의 생기 넘치는 웃음소리. 소리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희망'은 '생명'을 지키려 하고, 그것을 향해 노력하며 나아가는 우리의 '신념'이 낳는 것이었다.



지금, 살아 있는, '생명' 자체가 '기적'


그 작은 새 생명을 지키려고 줄리안, 재스퍼, 미리엄, 테오를 비롯해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으나, 그들은 모두 '신념'을 위해, '새 생명'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 하거나 고통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아기. 마지막 장면에서 키는 아기의 이름을 '딜런'으로 짓겠다고 한다. '딜런'은 테오의 아이였지만 상징적으로는 '인류'의 아이이기도 했던 셈이다. 어쩌면 '운명'은 딜런의 '죽음'까지가 아니라 새로운 딜런의 '탄생'까지 포함한 모든 과정이었던 것 아닐까? 그리고 '딜런'은 또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뱃속에서 태어나는 아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에 있는 '생명'을 강조하고 싶었다. 이 글을 쓰는 나나, 읽고 있는 당신이나, 우리는 '살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생기 있는' 표정을 짓고 살아가고 있을까? 유행어 "살아 있네!"처럼, 우리는 정말 '살아' 있을까? 영화에서 그려놓은 암울한 미래가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시간'의 입장에서는 '인류'가 있건 없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절대적인 우주의 시간적 흐름이 아닌, '인류가 살아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세상에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생명'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있다. '어제의 나'를 '살아 있다'고 하지 않지 않은가? 우리는 현재에 '살아 있다'. 그러니 영화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지 않으려면, 바로 지금 일어난 '기적'을 지켜야 한다. 단 하나 뿐인 우리의 생명은 모두를 평등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른 것이 아니라, 똑같은 생명이기에 모두가 옳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가 '영원히' '누구보다 잘' 살고 싶어하지만, 사실 '영원한 삶'의 열쇠는 '함께'에 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으나 지금 이 순간 함께 살아 있음이 기적임을 알고, 최선을 다해 살고, 살리고, 지키자. 지킬 것이 있을 때, 지켜야 한다.



제발.. 함께 살고, 함께 살리자.


요즘 몸이 너무 아파서 지쳐 있었던 건지,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는데 누군가 나더러 그렇게 생기 없는 모습을 처음 본다고 말을 했다. 그 때 새삼 알아차렸다. 몸이든 마음이든 내가 아프고 지쳐 있으면 주위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겠구나. (ㅠㅠ) 모든 것은 '나'로부터다. 평소에 잘 웃는다, 생기 있어 보인다 라며 그 덕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을 들으면 쑥쓰러워 하긴 해도 기분이 참 좋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행복에, 행복을 나눠준다는 생각도 없이 행복을 나눠줄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 생기 있는 웃음도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나오는 것이니, 내 건강은 내가 챙겨야지.


UN에서 평화에 대해 말하길, 한 사람의 마음에서 미움이 없어질 때 세계에도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 했다고 들은 것 같아서 검색했던 페이지에서 찾으려던 건 못 찾고 이것을 발견했다. 마음수련 명상으로 우명 선생이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받았다는 내용. 마음수련 소개에도 나오는 말이라서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의아했었는데 이 상의 취지를 읽어보니 이제야 이해가 된다. 나도 평화는 위대한 한 사'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함께 만드는 것'라고 생각한. 그렇기에 나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 바로 당신이 복했으면 좋겠다.


http://maummonthly.com/mahatmagandhipeaceprize/

https://www.youtube.com/watch?v=LNexppWRQkY


만들자, 생기 있는 웃음이 넘치는 세상





어디선가 들었는데, 아기는 자기를 보고 웃음을 지어주던 엄마와 눈을 맞췄는데 엄마가 웃지 않으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쳐다 본대요. 다시 봤을 때 엄마가 웃고 있으면 안심을 하고 따라 웃는데 다시 고개를 돌리고 봤는데도 엄마 표정에 변함이 없으면 그 때서야 엄마의 표정을 인식하고 따라 울거나 한다네요.


꼭 유리로 된 거울을 들여다 봐야 나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아이들이 우리의 거울이니까요. 아니, 세상이 우리의 거울이지요. 게다가 행복은 전염된다고 하잖아요? 당신의 오늘 하루가 더 행복하길, 당신의 생명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하루가 되길 바랄께요. 아마도 그덕에 나도 더 행복할 테니깐, 이건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기도 해요!







당신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요?







혹시나 무표정일 당신을 위해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묻겠어요.







당신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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