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구스타브스베리를 사는 이유 12
* 이 작품은 소설입니다. 지명, 인물, 사건 모두 실제와 아무 관련 없습니다
너무 커다란 충격 때문인지 두통이 심해서 결국 침대에 누웠는데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고, 일어나 보니 하루가 바뀌어 있었다.
그 사이 그는 열 살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괜찮냐고 자꾸 물어서 귀찮다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붙었는지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사실 말을 건네기가 무서웠다.
낯선 남자였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내 애인이었는데, 이제 보니 전혀 모르는 남자가 내 애인의 탈을 쓰고 있었던 거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내 애인 역할을 하고, 나와 떨어지면 다른 이의 애인인 남자.
다른 누군가와 뒹굴고 난 몸으로 다시 나를 안은 남자.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성격이 차분하고 듬직해서, 사랑하는 애인이기도 했지만 인격적으로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떤 커플과 견주어도 조금도 꿀리지 않을 만큼 자랑하고 싶은 그런 애인이었다.
그런 남자를 한순간에 잃었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의 애인이었던 남자가 내 사랑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나에게 자꾸 미안하다 하고 어떻게 하고 싶냐 묻는 게 무섭고 싫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로 도망갔다.
검색해 보자.
누군가에게 충고를 듣고 싶어.
네이트 판에 들어갔다.
게이 부부로 살아온 내 인생이 이성애자 부부, ‘너네들’보다 후지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을 때마다 즐겨 찾던 곳이었다.
그들의 엉망진창 ‘이성애’ 부부 생활을 맘껏 비웃기 위해 찾았었는데, 이 때는 나를 도와줄 유일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바람, 걸리면 죽었어~> 카테고리 클릭.
세상에!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다 내가 쓴 거 같아. 어쩌면 나랑 이렇게 똑같지?
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고? 댓글은 뭐였지?
사람들은 이런 사연에 뭐라고 충고해 줬지?
[일단 휴대폰의 내용을 모조리 저장해 두세요. 나중에 위자료 청구할 때 반드시 있어야 해요. 그리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도 절대 넘어가지 마세요. 한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해요. 특히 바람은 한번 피워 보면 또 피우게 됩니다. 중독성이 있거든요. 바람둥이는 고쳐서 쓰는 거 아니래요. 만약 뻔뻔하게 나오면 그 상간녀와 나눈 대화를 인쇄해서 회사에 뿌려버려요.]
싫어.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게이커뮤니티 사이트에 들어가서 물어봐야겠어.
[화면 캡처해서 회사에 확 돌려버려요. 게이라 소문나서 회사 잘려버리게.]
게이랑 이성애자의 차이는 없었다.
모두가 대동단결! 복수, 복수, 복수!
사람들은 피를 원했다.
하루를 꼬박 앓아누운 후, 결국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최대한 경비를 아끼기 위해 모조리 취소불가 옵션으로만 짜 놓아 취소하면 수백만 원에 가까운 돈이 날아갈 터였다.
“돈 때문이라면 신경 쓰지 마. 지금 네가 가장 하고 싶은 대로 하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자. 가족들 보고 싶지? 친구 만나고 싶지 않아?”
누군가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찾으라는 참으로 친절한 안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최상의 솔루션을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안 갈래.”
준비하느라 수고한 노력, 들어간 돈이 아까워서 그렇다고 말했다.
한국에 간다고 딱히 해결책을 찾을 거 같지도 않다, 그냥 계속 여행하면서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냥 계획한 대로 움직일래.
그러다 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그러나 하루를 꼬박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난 결론을 내렸다.
묻어버리기로.
불행한 이혼서류 하나 남길 수 없는 게 우리 관계
십 년을 부부로 살아왔지만, 그 사실을 아는 세상 사람들은 많지 않다.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적 관계에서도 배제되어 왔다.
그래서 뭐 어때, 오히려 편하고 좋네, 가족놀이 지겹잖아, 커밍아웃은 손해지,라고 가볍게 여겼던 그 현실이 묵직하게 가슴을 쳤다.
심장이 갈가리 찢어질 듯 아픈데도, 어디 한 군데 토해낼 곳이 없고,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 하나 없었다.
내 형?
금쪽같은 내 동생 가슴에 못질했다고 주먹이라도 날려줄까?
나쁜 놈이네, 한 마디하고 끝일 테다.
딱 그 정도의 친분만 쌓은 가족놀이였으니까.
속으로는 그럼 게이들이 그렇지, 부부 흉내는 무슨, 하면서 비웃을 지도 모른다.
이참에 잘 됐다, 여기 와서 택배 일이나 도와라 할 가능성도 높다.
그의 가족?
네 놈 때문에 우리 귀한 아들이 장가 안 간다고 했던 거구나. 이 나쁜... 아니지, 헤어진다고?
아이고 떨어져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큰 절이라도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 아들 밥은 누가 해주나, 걱정하겠지.
게이세계에서 유일하게 활동했던 '커플 모임'의 친구들.
나의 유사가족들.
"포항에 아는 사람 하나도 없고, 너무 외롭다. 여긴 게이바도 없잖아. 친구들 사귈 수 있는 방법 없어?"
"꼭 친구가 필요해? 나 하나로 만족 못 해? 난 너가 여러 사람 만나는 거 싫은데."
내가 너무 예뻐서 다른 게이를 만나면 불안하다고 했었던가, 포항이란 동네가 너무 좁아서 아무나 만났다가는 강제로 아웃팅 당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던가.
"정 게이 친구가 필요하면 커플모임에 나가보는 게 어때? 거긴 안심할 수 있잖아."
언제나처럼 그는 명확하고 효율적인 솔루션을 제공했다.
같은 처지, 같은 고민을 공유한 사람들이라니, 자석처럼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집집마다 번갈아 식사자리를 만들어 살림자랑도 하고, 같이 여행도 다니고, 가족들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긴급 피난처도 제공해가며 순식간에 피붙이처럼 친해졌다.
포항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인맥, 내 SNS의 대부분.
그들은 나의 고통을 이해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을까?
그래, 그럴 거야. 내가 울고불고하면 같이 욕 해주겠지.
복수해!라고 하면서, 그런 놈은 다시는 이 바닥에 발도 디딜 수 없게 해야 한다고 분개해 줄 거다.
하지만 그렇게 한바탕 살풀이가 끝나면, 그들과의 교류는 자연스럽게 끊어질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커플모임은 커플에게만 자격을 부여한다.
물론 모임에 나가지 못해도 형동생처럼 지냈던 게이들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얘네들은 여전히 알콩달콩 잘 살고 있는데, 나는 뭐야... 상상만 해도 비참해진다.
더 멋진 남자를 만나서 다시 커플모임에 들어가?
전애인에 대한 기억을 같이 공유한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그 공간에?
연인과 헤어지는 순간 내 준거 집단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렇게 친했는데, 한순간에 남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
지난 십 년 동안 아기돼지 삼 형제의 첫째처럼 짚으로 집을 지어놓고 외려 통풍 잘 되고 편안하다며 노래를 부르며 살았다.
집터가 모래사장이라도 괜찮아, 사랑의 마법을 걸었으니 절대 무너지지 않아, 요즘은 초등학생도 믿지 않을 허술한 러브스토리에 빠져 있었다.
벽돌집을 지어야 한다고?
귀찮은 데다가 타산적이기까지 하잖아.
“난 그렇게 이것저것 따지며 사람 만나는 거... 사랑이라고 생각 안 해!”
우리 인생에 나타날 리 없는 늑대를 상정해놓고 미리 걱정하고 다투다니, 어리석다며 혀를 찼다.
‘늑대를 피할 스물여섯 가지 방법’ 같은 자기 계발서라도 쓴 작가라도 된 양, 요령 있게 살아가는 척 굴었다.
그랬더니?
충분히 예측 가능한 문제들로부터 애써 고개를 돌린 대가는?
후~ 바람이 한번 몰아치자 내 사랑, 내 자존심, 한순간에 쓸려가 버렸다.
사랑의 집이 있던 자리엔 지지대조차 남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말하길, 내가 화를 내지 않아서 더 무서웠단다.
왜 이렇게 살아왔지?
왜 이 따위로 살아온 거지?
스스로에게 화를 내느라 정신이 없어서 정작 그에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손톱을 있는 대로 세우고는 자존감의 벽을 박박 긁어 생채기를 내다 못해 곤죽을 만들어버렸다.
그러면서도 헤어지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헤어지는 것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 짐을 싸서 가족에게로 돌아간다면?
평생을 같이 보내도 함께 살았다는 증명은커녕 불행한 이혼서류 하나 남길 수 없는 게 우리 관계였다.
‘너네들’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도대체 뭘 믿고 그토록 오만방자했던 걸까.